의료소송 걸어봐야 반타작… 왜?

  • 입력 2009년 6월 5일 03시 00분


[1] 변호사의 의욕 과잉?
예전엔 ‘이길만한 사건’만 맡아 승소율 높아

[2] 법원의 엄격해진 잣대?
‘의료사고 책임 입증’ 非전문가인 환자 불리
“의사가 무과실 입증하라” 법안 대기중

2001년 8월 전모 씨(서울 용산구)는 “의료진이 제왕절개수술을 빨리 시행하지 않아 태아가 사망했다”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자궁 안에 있는 태아의 심장박동수(심박수)가 때때로 감소하는 등 ‘태아곤란증’이 의심됐는데 의료진이 제왕절개수술을 하지 않았다고 법원이 판단한 것이다.

반면 2004년 9월 이모 씨(서울 강남구)가 제기한 비슷한 내용의 소송은 기각됐다. 법원은 “태아 심박수가 때로 감소하더라도 잠시 후 회복됐다면 제왕절개수술을 꼭 실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법원이 제왕절개수술이 필요한 조건을 전 씨에게는 넓게, 이 씨에게는 좁게 적용한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로 불리는 의료사고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20년 새 22배나 늘었다. 그러나 환자 측이 승소하는 사례는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법원의 잣대는 까다로워졌는데 의료사고 입증 책임은 여전히 환자 측에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는 비율도 크게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 소송 22배 늘었지만 배상 판결은 ‘뚝’

사법연감에 따르면 법정으로 간 의료분쟁은 2007년 932건으로, 1989년(42건)에 비해 22배나 많아졌다. 의료서비스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시민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진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 측이 일부라도 배상을 받는 비율은 턱없이 낮아졌다. 일부 승소를 포함해 환자 측이 배상금을 받은 경우는 2007년 520건으로, 전체의 55.8%였다. 절반 정도만이 배상금을 받은 셈이다. 1989년에는 이 비율이 78.6%였다.

환자 측에 불리한 1심 판결 비율이 늘어나면서 항소 비율도 높아졌다. 1989년 23.5%에 불과했던 항소 비율은 2007년 59.6%로 배 이상 뛰었다. 다른 소송의 항소율은 이처럼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지 않는다. 유독 의료소송에서만 판결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비슷한 사례에서 정반대의 판결이 나오는 것도 항소율을 높이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산부인과 소송에서 진료기록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둘러싼 법원의 판단이 그런 사례다. 태아 심박수 기록을 법원에 제출하지 않은 두 가지 사례에 대해 법원은 2001년 12월 신모 씨(서울 강남구)의 경우엔 “진료기록이 없다면 측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2004년 9월 이모 씨(서울 강남구) 사건 땐 “(간호사가 관찰했다면) 제출 의무 없다”고 판단했다.

○ ‘전문화의 모순’에 빠진 법원?

과거에는 의료전담 변호사들이 승소할 가능성이 높은 사건들만 골라 맡았기 때문에 소송이 적은 반면 환자에 대한 배상 비율은 높았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법원이 의료사고의 책임을 입증하는 데 예전보다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고 있어 결과적으로 비전문가인 환자 측의 승소율이 떨어진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의사 출신 변호사들이 등장하면서 소송에서 예전보다 의료현장의 ‘정서’가 더 많이 반영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법무법인 ‘서로’의 서상수 변호사는 “법률적 시각에서 과실 여부를 따져야 하는데 의료현장에 있는 의사의 시각이 앞서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법원이 ‘전문화의 모순’에 빠졌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법정에 의사를 불러 판사, 원고, 피고가 의견을 묻는 ‘전문심리위원제도’ 또한 의료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식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법무법인 ‘해울’의 신현호 변호사는 “의료계는 좁기 때문에 위원들이 환자에게는 불리하지만 의사에게는 유리한 내용의 조언을 할 수도 있다”며 “위증했을 경우 전문심리위원에게 법적 책임과 의무를 지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의료분쟁조정법 국회 공방 예상

의료분쟁의 조정 절차를 담은 법안을 민주당 최영희 의원과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이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17대 국회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있었지만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과실을 입증하는 책임을 누구에게 지우느냐를 두고 공방을 벌이다 회기 만료로 폐기된 바 있다. 이번에도 이를 둘러싸고 날선 공방이 예상된다. 최 의원의 법안은 의사가 자신의 무과실을 입증해야만 피해 배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지만 심 의원의 법안은 의사의 입증책임을 명시하면서도 환자 또한 의사의 과실을 증명해야 한다고 단서 조항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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