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스크린리더 개발한 ‘시각장애 선배’ 김정호씨

  • 입력 2008년 10월 24일 02시 56분


문서파일을 음성으로 변환시키는 스크린 리더 프로그램을 개발한 김정호 씨. 김 씨가 개발한 프로그램 덕분에 최영 씨가 시각장애인 최초로 사법고시 2차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원대연 기자
문서파일을 음성으로 변환시키는 스크린 리더 프로그램을 개발한 김정호 씨. 김 씨가 개발한 프로그램 덕분에 최영 씨가 시각장애인 최초로 사법고시 2차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원대연 기자
司試도전 최영씨 위해 스크린리더 개발한 ‘시각장애 선배’ 김정호씨

“내게 책을 읽어줬던 영이…

그마저 끝내 시력을 잃자

난 그의 눈이 되고 싶었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2차 사법시험에 합격한 최영(27) 씨. 그의 아름다운 성취 뒤에는 또 다른 시각장애인 후원자가 있었다.

최 씨가 눈 대신 귀로 방대한 분량의 시험 교재를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 김정호(36) 씨. 그가 한글 텍스트로 모니터에 떠 있는 교재 내용을 음성으로 바꿔주는 프로그램인 ‘스크린 리더’를 개발한 덕분에 최 씨는 귀로 법전을 익힐 수 있었다.

23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하상장애인복지관에서 만난 김 씨. 그는 “시련을 딛고 도전을 감행한 영이가 너무나 자랑스럽다”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2000년 5월, 김 씨는 최 씨의 도움으로 논문을 준비하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선천적 시각장애로 책을 볼 수 없었던 김 씨는 당시 서울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논문을 준비하며 자료를 대신 읽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김 씨가 장애인복지관의 소개로 만난 자원봉사자가 바로 서울대 법학과 새내기인 최 씨였다. 입학 직후 최 씨는 시력이 급격히 악화됐고 두려운 마음에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자원봉사에 나선 것이었다.

최 씨는 그나마 남아 있던 시력으로 책을 읽어 주었고 김 씨는 장애인 선배로서 최 씨의 정신적인 멘터가 되었다. 김 씨는 “가족들에게도 이해받기 어려운 고통을 함께 나누며 우리는 친형제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책을 볼 수 없다는 한계를 딛고 사법시험에 도전하겠다는 최 씨를 보며 김 씨는 “영이가 나에게 그랬듯 나도 영이에게 눈이 되어 주고 싶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시각장애인 전문 프로그램인 ‘스크린 리더’. 김 씨가 대학원 졸업 후 다른 시각장애인 3명과 함께 서울 구로구의 한 골방에 벤처기업을 창업해 3년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시각장애인들이 사법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김 씨는 최 씨가 시험을 볼 때마다 하루 먼저 시험장에 가 프로그램을 설치해 줬다. 2차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가 난 21일 최 씨는 김 씨에게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알렸다.

김 씨는 “영이는 장애인에게도 사회의 리더로 성공하는 기회가 열려 있다는 걸 보여줬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는 ‘스크린 리더’가 도입되면서 점자에 제한되어 있던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 경로가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프로그램을 활용하려면 책을 한글 텍스트 파일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저작권 문제가 발생한다. 시험교재를 한 장 한 장 작업해 텍스트 파일로 만들 경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김 씨는 텍스트 파일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출판물의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이스 브레일(음성 점자)’ 프로그램을 최근 개발했다. 김 씨는 12월 이 프로그램을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급할 예정이다.

그는 “책을 볼 수 없으면 ‘시각장애’가 ‘정보장애’를 초래하고 결국 장애인 빈곤으로 이어진다”며 “장애인이기에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지만 정보기술(IT)과 접목하면 수많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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