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1년 소련 수소폭탄 ‘차르 봄바’ 실험

  • 입력 2006년 10월 30일 03시 01분


코멘트
“모스크바에 있는 모든 창문을 깨뜨리게 될까봐 폭발 규모를 일부러 줄였다.”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1961년 10월 30일 수소폭탄 ‘차르 봄바(Tsar Bomba)’ 실험 직후 이같이 발표했다. 100Mt(메가톤·1Mt은 TNT 100만 t의 폭발력)에 가까운 폭발력을 50Mt으로 줄였다는 것.

그의 말이 너스레만은 아니었다. 실제 차르 봄바는 3단계(핵분열-융합-분열) 과정을 제대로 거치면 100Mt이 넘는 위력을 가진다. 폭발력을 줄이기 위해 세 번째 핵분열 단계에서 우라늄238 대신 납을 사용했다. 이유는 너무나 클 방사능 낙진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차르 봄바는 역사상 가장 크고 강력한 폭탄이었다. 무게만 27t에다 길이가 8m에 달했다. 차르 봄바 실험을 위해 특별 개조된 폭탄투하기 Tu-95가 사용됐고 옆에서 대기 샘플을 채취하고 폭발 장면을 촬영할 관측기 Tu-16이 투입됐다.

차르 봄바는 무게 800kg짜리 감속 낙하산에 매달려진 채 투하됐다. 투하 즉시 항공기가 그라운드제로로부터 안전거리(최소 45km) 밖으로 피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항공기 승무원들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었다.

핵실험이 이뤄진 곳은 유럽 동북쪽 말단인 북극해상 노바야제믈랴 섬. 10km 상공에서 투하된 폭탄은 4km 상공에서 폭발하면서 거대한 불덩이를 만들었고 이는 1000km 밖에서도 관측됐다. 100km 거리에선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버섯구름은 더욱 장관이었다. 60km 상공까지 뻗쳤다. 핀란드에서도 이 버섯구름을 볼 수 있었고 일부 유리창까지 깨졌다고 전해진다. 전 세계의 모든 지진관측기가 흔들렸음은 물론이다.

흐루쇼프가 슈퍼 핵폭탄 프로젝트를 지시한 것은 그해 6월. 그는 시한을 소련 공산당 22차 전당대회가 열리는 10월 말로 정했다. 체제 우위 경쟁이 한창이던 냉전시기 선전용이었다.

원래 암호명은 ‘이반’이었다. 차르 봄바는 서구 쪽에서 만들어진 명칭이었지만 요즘엔 러시아에서도 그렇게 통한다.

어쨌든 차르 봄바 실험은 핵폭탄 대형화 경쟁의 클라이맥스이자 끝을 알리는 마지막 진동이었다.

운반수단으로 폭격기밖에 없던 시절 핵폭탄은 무조건 크면 클수록 좋았다. 하지만 얼마 뒤 개발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초대형 폭탄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이후 핵무기 설계의 초점은 정확성과 소형화, 안전성에 맞춰졌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