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회 '살생부'파문]"구조조정도 지역차별" 소문이 사실로

  • 입력 2002년 3월 20일 06시 47분


오영우 당시 회장
오영우 당시 회장
한국마사회의 ‘구조조정용 살생부(殺生簿)’는 그 내용이 정말 충격적이다.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 현 정부 주도로 진행된 공기업과 산하단체, 정부투자기관 등의 인력 구조조정이 상당 부분 지역 차별적이며 정치적 성격이 강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사회가 정리 대상을 선정하기 위해 2급 이상 간부들은 물론이고 기능직과 기수 등 전 직원에 대해 개인별로 현 정권에 대한 지지 여부와 정치 성향을 분석하고 이를 중요한 자료로 삼아 정리 대상을 선정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문건 작성 주체〓본지가 단독 입수한 문건은 ‘구조조정 일정 등 보고(98. 9 비서실)’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정리해야 할 직원들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 A4용지 38장 분량이다.

마사회 관계자는 “문제의 문건들은 당시 오영우(吳榮祐) 회장이 주재하는 고위 간부회의에 회의 자료로 사용됐으며 오 회장의 지시에 따라 비서실이 주도해 작성하고 임원들이 회람했다”고 증언했다.

문건과 마사회의 실제 구조조정 상황을 비교하면 마사회측은 인력 조정을 위한 노사 합의가 이뤄지기 훨씬 전에 이미 강제 해직을 위한 절차와 시점, 관련 규정을 검토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인원 감축 이후 호남 출신을 우대하는 승진 인사가 검토됐으며 99년 1월1일자로 실제로 대대적인 승진 인사가 단행됐다.

▽정치적 지역적 성향 분류〓마사회는 인력 구조조정을 하면서 외형상으로는 △생계 유지 가능 정도 △불법 부정 경마와 관련된 자 △직무수행에 필요한 자격증 미소지자 △장기 근속자, 고령자 △징계처분을 받은 직원 등을 정리해고 기준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문건에 따르면 실제로 마사회가 정리해고자를 결정하는 데 적용한 중요한 기준은 정치 성향과 출신 지역 및 사내 인맥이었다.

문건에 명시된 ‘정리해고 대상 유형’을 보면 △지역 편가르기와 직원간 위화감 조성에 앞장서고 아직도 반성하고 자숙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 자 △과거 정권의 여러 단체로부터 추천받아 정치권 줄대기에만 급급한 자 등의 ‘정치적’ 기준이 적시돼 있다.

특히 직원 개인별 성향을 분류한 표에는 출신 지역과 정치 성향, 사내 파벌에 따라 정리 대상자와 잔류자를 구분했다.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에는 1급 간부부터 기능직 직원 및 조기협회 기수협회 마주협회 소속원까지 모두 101명의 성향이 자세히 기록됐다.

대구 출신으로 강제해직된 A지점장은 비고란에 ‘특정 지역 출신 탄압 주동자’로 적혀 있다. B지점장은 ‘전 기득권 세력 추종자, 현 노조에 대한 비판세력’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공란에 ‘生(생)’이라는 한자가 적혀 있으며 실제로 B지점장은 정리 대상에서 제외됐다.

C과장은 ‘반개혁적인 인물’, D지점장은 ‘지역차별주의자’, E과장은 ‘지역편향성, 반개혁인물’, F계장은 ‘지역편향자 특정지역인 탄압 주도’라고 평가됐다.

특히 같은 팀 소속의 4급 직원 3명에게는 ‘반개혁 인물 이회창 지지자’라는 공통적인 평가가 적혀 있었다. 이 밖에도 조교사 G씨는 ‘박○○ 추종자 김대중 대통령 비난 반개혁인물’, 조교보인 H씨는 ‘철저한 반김대중, 편향주의자, 반개혁인물’이라고 적혀 있다.

한편 사업이사 산하의 각 과 소속 직원들의 성향을 분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명조정(안)’ 문건에도 비슷한 직원 분류가 나타난다. I과장(45)의 경우 ‘능력 및 성향’란에 ‘지역탄압 주동세력’이라고 적혀 있다.

▽특정 인맥 죽이기〓마사회는 출신 지역과 정치 성향 외에도 사내 특정 인맥 제거를 정리 대상 선정의 또 다른 목적으로 삼았다. 이는 비서실이 작성한 ‘정리 대상 평가내역’에 나온 39명 중 19명의 평가에 ‘김○○ 계열’이라고 적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1998년 4월 오 회장이 취임하면서 물러난 김○○ 이사는 경북 안동과 건국대 출신으로 마사회 공채(1기) 출신의 유일한 이사였다.

또 ‘출신 대학별 직원’이라는 문건에는 5급 이상 직원들을 출신 대학별로 분류하고 ‘참고사항’에 ‘김○○ 전임이사가 건국대 출신으로…(중략)…핵심 요직에 건대 출신을 대거 포진시켜 조직을 장악…(중략)…건대 출신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적혀 있다.

▽구조조정 결과〓마사회는 1998년 9월22일 1급 12명, 2급 16명에게 ‘9월23일까지 명예퇴직이나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으면 직권면직하겠다’고 통보했다. 이후 1급 9명이 퇴직을 신청했고 이를 거부한 3명이 사실상 강제해직에 해당하는 직위해제를 당했다. 2급의 경우 16명 중 11명이 퇴직을 신청하지 않아 직위해제됐다.

사측의 강요로 퇴직한 1, 2급 직원의 출신 지역을 보면 영남이 11명으로 가장 많았고 △서울 7명 △충청 3명 △경기 2명 △호남 2명 △강원 2명 △제주 1명 등의 순이었다.

노조원인 3급 이하 직원의 경우, 마사회는 같은 해 11월20일부터 25일까지 퇴직 신청을 받았다. 개편된 직제에 따라 정리해야 할 인원은 27명이었지만 명예퇴직 위로금 때문에 67명이 지원했다. 그러나 사측은 퇴직을 희망하지 않은 일부 직원을 포함시켜 27명을 정리했다.

한편 구조조정 직후인 99년 1월1일 단행된 1, 2급 인사에서 승진한 간부 25명의 출신지는 △서울 10명 △호남 9명 △영남 3명 △충청 2명 △강원 1명 등이었다.

이 훈기자 dreamland@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