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첫 증언 김학순 “날 사용해 세상에 알리라”…생존자 AI 증언도 나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5일 20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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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총무 뭐 하는 거요. 일본이 이렇게 날뛰고 있는데 왜 가만히 있어요. 나를 당장 (기자회견으로) 불러내세요.”

1991년 8월 13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현 정의기억연대)에서 일하던 윤영애 씨(78·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에게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음 날인 14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 할머니는 “위안부로 고통 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은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고 하니 말이나 됩니까”라고 말했다.

정부는 2017년 김 할머니가 한국에서 최초로 위안부 피해를 세상에 알렸던 8월 14일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했다.

● “나를 사용해서 이 일을 세상에 알려달라”

윤 씨는 김 할머니의 증언 30주년을 맞아 14일 정의기억연대(이사장 이나영)가 개최한 ‘내가 기억하는 김학순’ 토크콘서트에서 김 할머니가 증언에 나서게 된 과정을 자세히 소개했다. 윤 씨는 1991년 4월 주한 일본대사관이 “(위안부 피해를) 인정할 수 없다. 증인이 나온다면 몰라도”라며 완강한 태도를 보이자 위안부 피해자를 수소문하던 중 그해 7월 김 할머니를 소개받았다.

1991년 8월 14일 한국에서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사진이 광복절인 15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추모 공간에 놓여 있다.
1991년 8월 14일 한국에서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사진이 광복절인 15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추모 공간에 놓여 있다.
윤 씨는 자신을 찾아온 김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흰 옷을 입고 온 할머니의 눈은 동화책에 나오는 사슴 ‘밤비’의 눈과 같이 두려움이 서려 있으면서도 초롱초롱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김 할머니는 윤 씨에게 “증언 권고를 받고 많이 망설였지만 스스로에게 ‘왜 모진 고통을 당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는가’라고 물으니 ‘내 아픔과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 후세의 다른 여성들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17세에 강제로 끌려가 3개월 동안 피해를 당한 사실을 털어놓으며 “마음이 후련하다. 나를 사용해서 이 일을 세상에 알리라”고 윤 씨에게 당부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김 할머니는 기자회견에 나가 위안부 피해를 공개 증언했다.

1991년 12월 7일 일본 오사카에서 증언 집회를 진행하고 있는 김혜원 씨(왼쪽에서 두 번째)와 고 김학순 할머니(왼쪽에서 세 번째). 김혜원 기증,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제공
1991년 12월 7일 일본 오사카에서 증언 집회를 진행하고 있는 김혜원 씨(왼쪽에서 두 번째)와 고 김학순 할머니(왼쪽에서 세 번째). 김혜원 기증,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제공


첫 기자회견 이후 김 할머니가 1991년 12월 일본에서 진행한 증언 집회에 대한 기억도 소개됐다. 정대협 창립자 중 한 명으로 김 할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증언 집회를 진행한 김혜원 씨(86)는 토크콘서트에서 “일본 도쿄 등 5군데를 돌아다니며 증언 집회를 했다”며 “꽉 찬 강당에서 환한 조명을 받은 김 할머니가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김 할머니는 (청중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흐트러짐 없이 말한 당차고 용기 있는 여성이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어 “집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일본인 남성 기자가 김 할머니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일본인인 것이 처음으로 부끄럽고, 남성이라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며 “김학순 할머니는 미투운동의 선봉자이자 성폭력 근절을 위한 횃불 같은 존재”라고 덧붙였다.

김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정대협에 피해 할머니들의 신고가 물밀 듯 들어왔고 정부는 이 가운데 238명을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TV에 어떤 할머니(김학순)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냈다”고 했다.

● AI 통해 할머니들 증언 생생히 남긴다

김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14명뿐이다. 여성가족부 등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시민들이 피해 할머니와 대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최근 선보였다. 여가부 산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와 서강대 ‘영원한 증언팀’은 6월 15일부터 11월 30일까지 서울 마포구 서강대와 대구 중구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서 ‘영원한 증언’ 전시를 진행한다.

13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94)와 대화할 수 있게 한 ‘영원한 증언’ 전시에서 한 시민이 할머니의 대답을 듣고 있다.
13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94)와 대화할 수 있게 한 ‘영원한 증언’ 전시에서 한 시민이 할머니의 대답을 듣고 있다.
이 전시는 이옥선(94) 이용수 할머니(93)의 증언이 녹화되어 있는 AI 프로그램에 시민들이 질문을 하면 그에 맞는 증언 영상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기자가 영상 속 이옥선 할머니에게 “어떻게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셨나”라고 묻자 이 할머니는 팔을 움직이며 “식모살이 하던 시절 주인이 시킨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끌려갔다”고 답했다. 이용수 할머니 역시 AI 영상에서 “굴다리에 가니 군인이 날 밀면서 내려가자고 했다. 장난인 줄 알았다. 16세에 기차를 처음 타봤다”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주최 측은 11월까지 시범 전시를 한 뒤 오류 등을 수정해 세계 주요 국가에서 공식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다.

13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3)와 대화할 수 있게 한 ‘영원한 증언’ 전시에서 한 시민이 할머니의 대답을 듣고 있다.
13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3)와 대화할 수 있게 한 ‘영원한 증언’ 전시에서 한 시민이 할머니의 대답을 듣고 있다.


●‘AI 증언’ 영상 중 질의응답 전문

▼이옥선 할머니(94) AI 증언 답변


(기자)-할머니 안녕하세요

(이옥선 할머니)=안녕하세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구십 넷.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무슨 공부가 하고 싶으세요?


=글 공부. 지금도 남 글 쓰는거 보면 참 부러워요.

-어떻게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셨나요?


=식모살이를 하다가 주인이 심부름을 보냈어요. 작은집이 옆에 있어서 심부름을 보내서 심부름 갔다 오다가 큰 길인데 웅장한 남자가 둘이 앞에 와 길을 턱 막아요. 길을 막아서 ‘너 어디 가니’ ‘이름이 뭐야’ 문의도 없이 한 놈은 팔 하나 쥐고 한 사람이 팔 하나 쥐고 무조건 끌고 갔어요. 그렇게 위안부로 갔어요.-할머니 위안소로 끌려가신 다음에는 어떻게 되셨나요?

=중국으로 갔지요. 그다음에 연길에서 내려가지고 차 타고 들어가다가 우리는 끌려가면서 위안소로 간 게 아니고 중간에 가다가 비행장에 들어갔어요. 여섯 사람 중에 나하고 다른 애 둘이 떨어져서 비행장에 들어갔지요. 비행장에 가서 일 한거죠. 동비행장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 비행장이 있어요. 왜 동비행장이라고 하냐면 동쪽에 있어서 동비행장이라고 그래요. 거기 가서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비행기 다니는 길을 닦는 거에요. 풀도 뜯고 호미질도 하고. 너무 살기가 바쁘니까 집에 보내달라고 우리가 좀 보챘지요. 그러니까 그때 우리를 위안부로 보낸 거에요.

-위안소에서 군인들이 하루에 몇 명이나 왔나요?

=그 사람들이 말하길 14살 짜리를 하루에 군인을 40~50명 데리고 와요. 하루에 시간이 몇 시간입니까. 하루에 시간이 24시간인데 어떻게 40명 내지 50명을 합니까. 생각해보세요. 그러니까 살기가 곤란하잖아요. 그러니까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죠. 목을 매 죽고 높은 산에 올라가 떨어져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이렇게 죽는 사람이 많죠.

-위안소에서 어머니께 뭐라고 편지 쓰셨어요?

=엄마한테 내가 고통스럽게 사는 것 이야기하면 엄마가 참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가슴을 뜯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잘 있다고 해야죠.

-해방되고 산에서 내려오고 나선 어떻게 사셨어요?


=그래서 해는 저물고 하니까 무식한 말로 개처럼 거꾸로 엎드려서 이렇게 손으로 가랑잎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서 산 밑으로 내려왔죠. 내려오니 조그만 오솔길이 있어서 그 길을 따라 연길 시내로 들어왔어요.

-‘위안부’ 피해자라는 걸 누구에게 가장 먼저 알리셨나요?

=위안부 피해자라고 이야기한 것은 성당 가고 싶어서 그때 이야기한 것이죠.

-친하게 지내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계세요?


=김군자랑 어떻게 친했냐면, 제가 중국에서 올 때 (나눔의 집이) 불교조직이어서 제가 말하기를 ‘나는 천주교인데 불교 믿는 데를 제가 가도 되겠냐’고 하니까 스님 말하는 게 신앙은 자유라서 믿고 싶은 대로 믿기 때문에 상관 없다고 해서 왔죠.

=오니까 마침 군자가 있어요. 김군자가 성당 다니는 사람이에요. 만나니까 얼마나 반갑습니까. 그래서 둘이서 한 번도 다툼도 안 하고 재밌게 지냈어요

-할머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에요?

=지금 가장 보고싶은 게 손자가 많이 보고 싶어요.

-증언 들으러 온 사람들한테 한 말씀 해주세요

=우리 힘이 모자라서 사죄를 받지 못하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힘이 자라는 대로 모두 모아서 우리 힘 자라는 대로 사죄 받게 해달라고 그저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어요.

-제가 할머니 친구해도 될까요?

=될 수 있어요.

-할머니 안녕히계세요

=궁금한 게 다 풀렸어요?


▼이용수 할머니(93) AI 증언 답변


(기자)-할머니 자기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이용수 할머니)=저는 1928년 12월 13일생에 태어난 이용수입니다.

-어릴 적엔 어떤 아이셨어요?

=제가 노래도 잘하고 할머니들 앞에서는 친구들도 그렇고 할머니들 앞에서 재롱을 잘 떨었거든요.

-어릴 때 가정형편은 어떠셨어요?

=가정형편이 그때는 다 없이 살았고, 형편이, 부양하기에는 안 했습니다. 가난했죠. 우리가 논이 두 마지기 있었는데 농사를 지으면 아버지 엄마는 참 고지식해요. 그런데 그걸 다 공출로 바쳐야 된답니다.

-어릴 적에 학교 다니셨어요?

=동네가 가까이에 야학도 있었습니다. 주간도 하고 야학도 하는 게 있었는데. 원래는 대구에 달성국민학교에 제가 3학년까지는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웃에서 보기를 저 집에는 아들이 많은데 계집애를 뭐하러 공부시키냐고 해서 제가 학교를 안 하고 야학에 다녔습니다.

-위안소에는 어떻게 끌려가게 되셨나요?

=나가서 조금 돌아가면 굴다리가 있어요. 굴다리가 가운데는 차가 가고 양쪽에는 사람이 다니고 위에는 기차가 다닙니다. 굴다리가 있는데 거기 가서 내려다 보니 여자아이 셋이 있고 군인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군인이 날 밀면서 내려가자고 해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니 여자 아이가 빨간 보자기를 날 안겨주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안았습니다. 그래도 무슨 놀이하는 건 줄 알고. 앞으로 밀면서 가자고 해서 군인이 둘이 따라오면서 가자고 해서 갔는데 그래도 그것도 장난인줄 알았습니다. 아무 소리 안 하고 갔는데.

=거기서 역이 가깝습니다. 저희 집에. 역으로 가서 우리 나이로는 16살이죠. 양력으로 해서 14살 밖에 안 됩니다. 14살에 16살에 제가 기차를 처음 타봤습니다. 이래가지고 싫다 나는 안 간다 저 사람 무섭다 나는 안 간다고 하니까 주먹으로 여자애 다섯을 쾅쾅 찍어서 정신 없게 만들고 너무 정신없고 아프더라고요. 나는 안 간다 안 간다 했는데 발길로 그것도 군홧발로 발길로 차고 조센징 죽인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아프니까 그런 줄 알았지 왜 그런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끌려간 게...(한숨)

-위안소에 도착해서는 어떻게 됐나요?

=군인이 하나 앉았더라고요. 근데 그 방에 들어가라고 해서 안 들어간다고 고개를 흔들면서 돌아올 적에 그냥 머리를 긋고 방안에 가서 자물쇠 큰 것 있는 것 떼었더니 문을 여니 광인데, 그 안에 보니 테이블이 하나 있고 작은 테이블이 하나 있는데 그냥 콱 밀어넣더라고요. 그래서 꺾어졌는데 와서 그냥 머리를 들고 허리를 세게 발길로 찼는데 간이 떨어지는 것처럼 너무너무 아팠습니다. 아프다고 하면서 내가 죄가 없는데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 빌고 이랬습니다. 이러고 또 해가지고 칼로 허벅지를 그리고 배를 그리고 이래서 손을 이렇게 놓고 하나는 여기 감고 하나는 여기 감고 한번 둘렀을 때 제가 뛰면서 ‘엄마’라고 세게 불렀습니다. 지금 머리에서 나는지 귀에서 나는지 항상 소리가 나고 있습니다.


박상준 기자speak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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