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백수 문학

  • 입력 2007년 12월 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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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단편 ‘성탄 특선’의 사내는 애인에게 밥값과 여관비를 신세 지는 실업자다. 성탄 전야에는 선물도 주고 칵테일도 마시고 더 좋은 모텔에도 가고 싶지만 돈이 없다. 이상운 장편 ‘내 머릿속의 개들’에 등장하는 청년 백수는 반지하방에서 뒹굴면서 ‘머릿속에 개들이 살고 있다’며 정신과 의사를 찾는다.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현대인이란 ‘지금 실업자인 사람’과 ‘조만간 될 사람’이라고 말한다.

X세대라 불리던 한국의 20, 30대. 이들은 생활에서 독립을 추구한 ‘인디문화’ 1세대며, 주변의 이런저런 잔재미에 푹 빠진 ‘마니아’ 1세대고, 인터넷 1세대다. 이들은 386세대를 사로잡았던 ‘조국과 민중’에 대해 마음껏 무관심해도 좋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년 동안 사회에 진출한 이들은 자유분방과 참신성 대신 조로와 무기력증을 앓고 있다. 실업 때문이다.

현실에서 패배한 이들을 보듬은 것은 문학이었다. 2000년대 소설과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입사 시험마다 떨어지는 청년 백수거나 백수 예비군 대학생이다. 386들은 민중 민주 개혁을 외치면서도 취직도 잘했건만 ‘포스트 386’은 ‘민중은 고사하고 시민으로도 진화되지 못하는 사회 낙오자들’(문학평론가 함돈균)이다.

이들은 때로 ‘많이 벌어서 많이 먹는 바쁜 인간들에게 조금씩 먹으면 되잖아’(구경미 ‘노는 인간’)로 응수하고 ‘직장 갖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박주영 ‘백수생활백서’)고 말한다. 큰소리의 밑바닥에는 허무와 냉소가 넘친다.

이들의 보금자리는 0.5평 고시원이다. 김영하 소설 ‘퀴즈쇼’ 주인공 20대 백수 민수는 고시원에서 ‘현실의 창 대신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창)를 선택’하면서 비루한 현실을 가상공간으로 대체한다. 김미월은 소설 ‘서울동굴가이드’에서 고시원을 서울에 새로 생긴 동굴에, 박민규는 고시생을 가구에 비유한다.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움직이는 행동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중엔 결국 움직임 자체가 없어지게 된다. 다리를 뻗을 수 없으니 늘 어딘가가 뭉쳐 있는 느낌이고 몸은 나무처럼 딱딱해져 간다. 마치 가구(家具) 같다.’(‘갑을 고시원 체류기’)

시인 차창룡은 노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도 닦는 것도 아니면서 세상을 등진 고시생들을 선승(禪僧) 아닌 선승이라 말한다. ‘여느 선방과 달리 방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습니다/잠을 자든 공부를 하든 밥을 먹든 자위행위를 하든/…/화장실은 늘 만원입니다/괜찮습니다 참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수행법이니’(‘고시원은 괜찮아요’)

‘찬란하던 그해에, 우리는 모두 이 땅의 자랑스러운 모험가였다. 진보와 향상은 우리를 숨쉬게 하는 이유였고 속도와 경쟁은 우리 삶에 부어지는 윤활유였다…그래서 우리는 달렸다…기다렸다. 누군가 우리에게 다시 접속해 주기를.’

소설 ‘피의 일요일’(윤이형) 주인공은 이렇게 바라지만 거짓 희망과 허황한 위선으로 점철된 현실에서 갈수록 고립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공포다. 문학평론가 도정일 씨는 “우리 시대는 실업의 위협으로 언제든 사회적 패자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공포의 정신 상태’에 갇혀 버렸다”고 말했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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