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인규]朴대통령에 감사해야 할 사람들

  • 입력 2006년 1월 4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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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 ‘동아광장’ 칼럼을 쓰게 된 나 때문에 연로하신 아버지의 심려가 크시다. “유신(維新) 시절 너처럼 고생했던 친구들은 현 정권에서 잘나가고 있던데, 너는 왜 또 권력자 반대편에 서서 쓴소리를 하려 드느냐?” 새해 벽두부터 불효막심이다.

1970년대 혹독한 유신 시절에 대학을 다녔던 나는 안병직 당시 서울대 교수와 강만길 당시 고려대 교수를 닮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처럼 자기 신념에 충실한 대학 교수가 되어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안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를 부정했던 대표적 좌파 경제사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치열한 공부와 ‘연옥(煉獄)의 고통’에 비유되는 사상 전향을 거쳐 지금은 박 대통령을 아주 높게 평가하는 인물로 거듭났다. 그에 비해 강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박 대통령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자유시장경제주의자인 나는 안 교수를 닮을 수는 있겠으나 강 교수를 닮을 수는 없게 됐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남은 강 교수는 부(富)와 명예와 더불어 죽은 자를 불러내 심판하는 권력까지 얻었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공직자윤리위원회에 본인 명의의 재산 17억여 원을 포함해 부인 및 장남 재산까지 모두 32억여 원을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가난한 집안 출신임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의 재산 규모에 놀랐다고 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강 위원장은 박 대통령이 이룩한 산업화의 가장 큰 수혜자의 한 사람으로 드러났다. 그 재산을 모으기까지 그와 부인은 근검절약하며 재테크에도 아마 남다른 신경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필리핀이나 미얀마의 민주 인사였다면 결코 지금의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 부를 가져다 준 교수직과 재테크 수단이 비교역재(非交易財)이고, 명예와 권력을 가져다 준 ‘민주화’라는 상품이 사치품이기 때문이다.

국제경제학에서는 재화를 반도체처럼 수출입이 가능한 교역재와 의료행위처럼 수출입이 어려운 비교역재의 두 가지로 나눈다. 비교역재 부문 종사자의 소득 향상은 교역재 부문 종사자들이 대외무역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박 대통령의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이 없었다면 비교역재 부문에 종사했던 강 위원장이 지금과 같은 재력가가 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산업화 초기 단계의 민주화는 사치품이다. 사치품이란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야 비로소 수요가 급증하고, 반대로 소득이 조금만 하락해도 수요가 급감하는 상품을 말한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민주화가 별 진전을 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로서는 사치품이던 민주화에 대한 우리 국민의 수요가 낮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 대통령이 주도한 산업화와 그에 따른 국민소득 향상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수준의 민주주의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살벌했던 유신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 꽃잎처럼 스러져 간 분들을 생각하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밀려온다. 이런 슬픔은 박 대통령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병행 발전을 추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원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병행 발전에 성공했던 국가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의 최근 연구 결과다. 민주화가 사치품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불가피성은 냉혹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경제학적 진리’다.

권력을 잡은 민주화 인사들의 ‘과거사 청산’ 작업이 개혁을 명분으로 새해부터 본격화될 전망이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진정한 개혁이란 아버지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식의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화 인사들은 박 대통령의 과오를 들추기에 앞서 오늘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그에게 먼저 감사하고 그의 상처까지 보듬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개혁의 전제 조건이다.

유신 시절에 나로 인해 아버지께서 입었던 상처가 이번 칼럼 쓰기로 덧나지나 않을까 하여 송구스럽다.

김인규 객원논설위원 한림대 교수·경제학 igkim@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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