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9년 베트남 ‘미라이 전투’ 진실 폭로

  • 입력 2004년 11월 11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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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1월 12일 미국 내 36개 일간지는 베트남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보도는 반전 여론을 불러일으켜 미군의 베트남 철수에 큰 역할을 했다.

사건은 1년6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5월 16일 오전 8시반 베트남의 북동부 해변 마을 미라이. 미군 100여명이 공격채비를 하고 있었다. 베트콩 소탕 작전. 그러나 적은 눈에 띄지 않았고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헬리콥터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병사들은 달아나는 목표물을 향해 조준사격을 했다. 작전은 불과 한 시간 만에 끝났다. 당시 민간인이 얼마나 희생됐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최대 500명 선으로 알려졌다.

이듬해인 1969년까지 사건의 진상은 감춰졌다. 군은 작전 과정에서 실수로 민간인 10여 명이 희생됐다는 보고서만 작성했을 뿐이다. 미라이 ‘전투’는 100여명의 적을 사살한 승리로 기록됐다.

세이모어 허시가 한 미군 장교가 베트남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혐의로 군 법정에 선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1969년 가을이었다. 당시 32세의 프리랜서 기자로 워싱턴에 있던 그는 바로 당사자인 윌리엄 캘리 중위가 있는 포트 베닝으로 날아갔다. 천신만고 끝에 그를 만났다.

“그는 ‘사건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이야기는 밤새 이어졌다.” 기사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작성됐다.

올해 67세인 세이모어 허시. 지금도 현역인 그에게는 늘 ‘탐사보도 전문기자’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칠레 아옌데 정권 관련 공작을 폭로했고 1986년에는 대한항공 007기 격추사건의 이면을 추적했다. 얼마 전 이라크 내 교도소에서 전쟁 포로들이 조직적인 가혹 행위를 당했다는 내용을 터뜨린 것도 그였다.

미라이 사건 기사는 1970년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당시 캘리 중위만 종신형을 선고받았을 뿐 나머지는 아무도 처벌 받지 않았다. 캘리 중위도 3년 후 자유의 몸이 됐다.

이런 의문이 생길 법하다. 그래도 펜은 칼보다 강한 것인가 하는.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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