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 입력 2003년 3월 28일 18시 00분


코멘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질 들뢰즈 지음 이진경 권순모 옮김/463쪽 2만5000원 인간사랑

질 들뢰즈는 스피노자라는 배를 타고 슬픔이 가득한 바다를 가로질러 기쁨이 넘치는 항해를 한다. 이 배는 도덕적 선과 악을 넘어서 윤리적 지복(至福)을 향하는 ‘지혜의 배’다. 선장은 모든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할 수 있는 항로로 안내한다. 들뢰즈는 이 책에서 스피노자를 운명론자나 노예적 인종(忍從)을 주장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능력의 극대화를 통한 긍정과 기쁨을 추구하는 철학자로 부각시킨다.

춘향과 이도령의 만남, 갓 피어난 개나리와의 만남, 직장 상사의 매서운 눈초리와의 만남, 미군과 이라크인의 만남…. 우리는 수많은 만남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만남에서 우리와 마주치는 것들은 어떤 감정을 촉발하는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양분, 사랑하는 사람, 동지와의 만남처럼 한 신체가 그 자신과 일치하거나 합성되는 다른 신체를 만나는 경우에는 기쁨을 낳는다. 독(毒), 미워하는 사람, 적과의 만남처럼 한 신체가 그 자신과 일치하지 않거나 자신을 파괴하는 다른 신체를 만날 경우에는 슬픔을 낳는다. 기쁜 감정은 우리의 ‘능력(potentia)’을 증가시키고 존재의 힘을 강화하지만, 슬픔은 우리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방해한다.

스피노자는 저서 ‘윤리학’에서 ‘기쁜 감정들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성이 기쁜 감정을 최대화하도록 마주침들을 조직할 것을 권했다.

자연은 필연적인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 우리가 자연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인식하여 적합한 관념을 생산한다면, 그것을 통해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연에는 선도 악도 없다. 즉 도덕적 선악의 대립이란 없고 윤리적 능력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성적이고 강하고 자유로운 자는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도록 그의 능력을 증대시킨다. 그는 우연한 만남들과 슬픈 감정들의 연쇄로부터 좋은 만남들을 조직하고 자신을 다른 신체와 합성하며, 그와 일치하는 것을 통일시키고 나아가 사회적 평면에서 개인들의 이성적인 연합을 이루려고 한다.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를 반복, 재생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복하면서 차이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는 스피노자 텍스트의 요소들이 지닌 속도와 다른 속도로 따라가거나 앞지르면서 스피노자와 합성되고자 한다. 그가 ‘표현’ 개념을 통하여 스피노자를 재구성하면서 초월적 본질과 현상을 갈라놓는 사고에 반대하여 (생산하는 자연과 그렇게 산출된 자연을 같은 평면에서 파악하는) ‘내재성의 구도’를 제시하는 점은 스피노자를 새로운 문제 앞에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기하학 이론서처럼 딱딱한 정리와 공리 등으로만 짜인 스피노자의 저서 ‘윤리학’ 앞에서 머뭇거렸거나, 철학적 개념들로 몸과 마음이 무거워진 이들에게 ‘즐거운 학문’과 스피노자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책이다.

양운덕 고려대 강사·서양철학 yw0813@chol.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