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러 차관, 안 갚는다면 그만인가

  • 입력 2002년 7월 19일 18시 50분


차관은 외국에 꾸어 준 돈이므로 돌려받는 게 정상이다. 구소련(현 러시아)에 제공한 경협차관을 회수하기가 어려워지자 정부 예산으로 대신 갚으려는 재정경제부의 방침은 그런 관점에서 대단히 비정상적인 발상이다. 잘못된 정책이니 즉각 철회해야 마땅하다.

문제의 차관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인 91년 북방정책을 추진한다며 제공한 것으로 시작부터 말이 많았다. 원금은 14억7000만달러였으나 현재 이자를 포함해 19억5000만달러로 늘었다. 이 가운데 정부가 대신 갚으려는 돈이 15억9000만달러(약 1조9000억원)라고 한다. 상환받을 확실한 안전판을 확보하지 않은 채 경제사정이 넉넉지 않은 국가에 선뜻 거액을 제공한 것도 정부의 잘못이고, 만기가 지났으나 이자는 물론 원금조차 받지 못한 것도 정부의 무능 탓이다. 그런데도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예산을 전용해 갚겠다는 것이니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부도덕한 행정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분노마저 느껴진다.

정부가 차관을 제공한 국내 10개 시중은행에 지급보증을 했기 때문에 은행의 대지급(代支給) 요구는 당연하다. 그렇다 해도 보증기간 연장 등의 수단을 활용해야지 어떻게 대신 갚으려는 발상을 할 수가 있는가. 만에 하나 이 소식을 접한 러시아가 ‘이제는 차관을 갚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 막무가내로 버틴다면 어찌하겠는가.

정부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각오로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상환방법을 이끌어내야 한다. 러시아가 이자율 인하, 상환기간 연장 등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방산물자와 원자재 등 현물로 차관 일부를 상환한 전례가 있으니 해결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재경부 관계자들은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것보다는 채무자인 러시아와의 협상에 당당하게 임하는 것이 옳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공무원들이 세금 낭비를 가볍게 생각할수록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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