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아의 책 사람 세상]적나라한 폭력 앞에서

  • 입력 2001년 9월 14일 18시 35분


미국 테러 소식을 듣고 나서, 마감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한참 동안 일을 손에 잡지 못했다. 평소에는 보지도 않던 TV를 켜놓고 뉴스를 바라보며, 인터넷 뉴스를 뒤지고 미국 사는 사람들에게 채팅으로 정황을 물어보며 그저 황망하고 우울할 뿐이었다.

아무 것도 손에 잡지 못한 나의 황망함은 사실은 아무 것도 손에 잡을 수 없는 무력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세상에는 이런 폭력이 저질러지고 이렇게 죽음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데,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책은, 음악은, 문화는 이런 적나라한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 잉여인가.

이런 기분은 나만 느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란 불가능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작가 커트 보네거트는 그의 역작 ‘제5도살장’(폴리미디어·1993년)에서 ‘유럽 역사상 가장 큰 대학살’인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것을 고백하면서 또한 이렇게 말한다. “그 대학살에 대해 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인터넷 일각에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팔레스타인인이나 다른 곳의 내전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애도를 표해본 적이 있느냐. 유독 미국인의 죽음에만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냉소적인 의견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다르다. 우리가 ‘남의 일’인 이 사건으로 인해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면, 그 슬픔과 분노는 죄없이 죽은 팔레스타인 민간인들, 지금 이 순간 죄없이 죽어가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에 대한 것으로 커질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폭력의 세기’(이후·1999년)에서 성찰했듯이,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관심과 냉소는 지성의 표시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이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썼던 유태계 시인 파울 첼란은 마침내 자살에 이르렀던 절망 속에서도 이렇게 노래했던 것이 아닐까.

‘이미 붙잡혔나이다, 주여. /서로 움켜잡고 뒤엉킨 채, /마치 우리 각자의 육체가 /당신의 성체인 것처럼, 주여. // 기도해 주소서, 주여. /우리에게 기도해 주소서. /우리는 가까이 있나이다.’(파울 첼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중·혜원출판사·2000년)

죄없이 죽어가는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당신의 성체’인 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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