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인종-성적 억압 '위험한 여성'

  • 입력 2001년 8월 31일 18시 35분


위험한 여성/ 일레인 김·최정무 편저 박은미 옮김/ 403쪽 1만5000원 삼인

이 시대의 여성은 ‘위험’하다. 인종적 억압에 성적 억압까지 중첩된 이중의 억압 속에서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는 동시에, 이런 억압 구조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높이며 남성중심적이고 서구중심적인 기존 사회의 가치관을 흔들어 놓는다는 점에서 스스로가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 ‘위험한 여성’의 문제에 한국사회의 민족주의 문제까지 곁들인다면, 이는 정말로 심히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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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오랜 동안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해 온 민족주의와 남성중심주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온 것도 하루이틀의 일은 아니지만, 아직도 견고한 이들 이데올로기를 하나로 묶으며 비판의 화살을 겨눈다는 것은 보통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본격적 시도는 그래도 부담이 조금은 덜한 해외에서 먼저 이뤄졌다.

주로 미주지역에서 활동하는 11명의 필자들은 한국의 사례를 통해, 한민족과 제국주의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민족주의와 성차별의 문제가 동아시아의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지엽적 지역적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태평양 연안 고속도로로 차를 몰고 가던 기분 좋은 어느 날 오후, 나는 백미러로 카키색 유니폼을 입은 한 젊은 미군이 군용 차량을 몰고 오는 모습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듯 옷매무새를 바로잡는 한편, 곧 등을 곧게 펴고 턱을 치켜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필자 중 한 사람인 미국 캘리포니아대 주립대(어바인) 최정무 교수는 이미 미국에서 교수의 위치에 있는 자신의 이런 무의식적 행동을 바라보며 곤혹스러웠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몹시 당혹스러웠지만, 미군이라는 특별한 이미지를 대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취한 이런 행동은 외세의 지배를 감내해야 했던 한국의 여성들에게 구체화돼 버린 습성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의 계몽된 남성 지식인들은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여성해방과 여성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지만, 이들은 여성과 민족을 분리해서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에게 여성 계몽은 강인하고 희생적인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 미국의 후원을 받은 군사정부는 한국의 전통적 유교 가부장제와 결합해 남한을 남성중심주의적 국가로 만들었다. 그 속에서 자라난 여성에게는 남성중심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이데올로기가 깊이 배어 있다.

11명의 필자가 쓴 13편의 글들은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보여준다. 미군을 상대로 성 노동에 종사하는 매춘여성, 1960년대 이후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침묵을 강요당했던 종군 위안부, 혁명적 남편과 아들을 위해 헌신을 강요당하는 북한의 혁명 여성, 분단 한국의 여성에게 있어서 국가와 가정의 의미…. 이들은 민족해방과 민주화란 이름 아래 묻혀졌던 다양한 여성 담론의 여지를 논의의 광장으로 끌어낸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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