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사람세상]"手談 통해 느림의 미학 배워요"

입력 2001-01-17 19:09수정 2009-09-2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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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초 서울 신촌거리의 한 기원. 어깨가 구부정한 노인과 자장면 내기 바둑을 두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이 판을 지면 저녁을 굶어야 하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바둑에 몰두했다. 어렵게 승리를 거둔 청년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 청년은 지금 사회과학, 특히 미디어 관련 서적 전문출판사인 나남출판사의 대표가 돼있다.

조상호(趙相浩·51) 사장. 그에게 바둑 얘기를 해달라고 하자 대학생 때 일화부터 꺼내며 “아직도 그 때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던 그는 박정희 정권이 위수령을 내리자 몸을 피신하기 위해 기원으로 숨어 들어갔다. 돈을 벌 수도 없어 매일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선 내기 바둑을 둬야 했다. 그의 바둑 실력은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던 3급 정도여서 그럭저럭 끼니는 떼울 수 있었다고 한다.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당시만큼 바둑이 재미있고 쑥쑥 늘었던 적도 없었어요. 짜릿한 승리를 거두고 민생고도 해결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어요. 그에 비하면 지금 바둑 두는 것은 맹탕에 가까워요.”

조 사장의 기력은 현재 아마 5단. 지난해 본인 표현대로라면 ‘간신히’ 한국기원으로부터 인허를 받았다. 조 사장은 바둑을 통해 느림의 미학을 배운다고 한다.

“정보화 시대로 갈수록 빠른 것이 최고인 것 같지만 사회가 빨리 돌아갈수록 우리 삶에는 한번 더 돌아보는 여유가 더 중요하게 됩니다. 바둑을 두다보면 그런 반성의 삶을 깨닫게 돼요.”

사회과학 전문출판사이지만 바둑 쪽으로 약간의 외도를 해 양상국 8단의 바둑시리즈 등 몇 권의 바둑책을 펴냈다.

그는 ‘바둑은 수담(手談)’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바둑을 두다보면 말이 없어도 상대방의 기분 느낌 등을 알 수 있어요.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대충 성격을 알 수 있어요. 바둑처럼 훌륭한 1대1 커뮤니케이션도 드문 것 같아요.”

그는 바둑을 진짜 좋아하는 매니아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 기자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한판 하고 가야지”하는 그의 눈길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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