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거실같은 화장실' 시대 "신발벗고 들어갈라"

  • 입력 1999년 10월 10일 19시 39분


고급스런 불투명 유리문을 열면 아이보리색 벽지가 발린 환하고 널찍한 공간이 나타난다. 가로세로 30×10㎝는됨직한커다란향비누는 손씻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한달 전 문 연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중국음식점 ‘루외루’의 화장실 풍경.

이제 화장실은 더이상 단순한 ‘배설의 장소’가 아니다. 서비스를 파는 업소, 특히 먹고 마시는 공간들은 고객 그 중에서도 여성고객의 눈높이에 맞춘 ‘품격있고 즐거운 화장실’로 손님을 손짓하고 있다.

▼방이야,화장실이야?

매장보다 환한 조명, 은은히 또는 신나게 흐르는 음악, 따뜻한 느낌의 실크벽지,향기나는 포푸리나 향수는 기본.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티하우스 ‘플로르 드 주르’의 화장실엔 150만원짜리 그림액자가 몇 개 걸려있다.

편안한 소파와 쿠션까지 갖춘, 정말 ‘방’같은 곳도 있다. 방금 소개받은 남자에 대한 품평, ‘상대편’에 대한 ‘우리편’끼리의 담합 등 내밀하고 노골적인 얘기가 자연스럽게 오간다.

“최근 1,2년새 서울 강남지역 음식점과 카페를 중심으로 화장실도 고급화 대형화추세를 보이고 있다. 대리석 도자기 유리 무늬목 등 고급스럽고 다양한 소재를 쓰는 것이 특징”이라고 참공간실내디자인연구소의 이명희소장은 말한다.

일본 카페들을 벤치마킹한 끝에 3개월전 다른 카페보다 두배쯤 넓고 쾌적한 화장실을 꾸민 청담동의 카페‘데프레’. 김용권부장은 “화장실은 가게의 얼굴이라는 생각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며 “주방 바로 옆에 화장실을 배치한 것도 화장실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완벽한 나만의 공간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해방공간. 변기 옆 작은 유리탁자 위의 재떨이와 잡지는 그곳에서의 자유를 만끽하게 도와준다. 16세기만 해도 유럽에서 문을 닫을 수 있는 화장실을 갖는다는 것은 일부 귀족의 특권이었다.

이제 세면대와 거울까지 변기와 같은 공간에 들어온 널찍한 화장실이 고객을 유혹한다. 프라이버시 영역의 확장. 더이상 다른 여성들에게 화장 고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공간이 넓어 변기에 앉으면 문에 노크할 수 없게 되자 변기 옆에는 벨이 따로 설치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비춰보길 원하는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신거울이 설치된 화장실도 적지 않다. 변기 공간의 3면 또는 4면을 거울로 둘러싸는 파격도 있다.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평소 못 보던 곳을 비춰볼 수 있어 재미있다”는 것이 고객들의 반응.

▼기억에 남아야 산다

‘여자화장실에는 앉아있으면 괴물이 쿵쿵쿵 앞으로 다가온다. 남자화장실은 괴물변기가 위아래로 덜렁덜렁 흔들거린다.’

최근 ‘똥신드롬’이라는 책을 펴낸 문화평론가 이규형씨는 일본 한 레스토랑의 기상천외한 화장실을 소개하면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서비스를 소홀히 한다면 서비스업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청담동의 카페 ‘1’ 화장실 문에는 남녀표시가 없이 ‘101’‘111’로만 돼있다. 손님들은 한참 갸우뚱거리다 알아채리곤(‘101’이 여자) 웃음을 터뜨리며 화장실에 들어간다.

외국에 갈 때면 화장실을 유심히 구경한다는 홍익대 김주연교수(실내디자인 전공).

“고객에게 특별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경쟁력 있는 공간은 대동소이한 매장이 아니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작은 공간, 화장실이다.”

〈윤경은기자〉ke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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