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노트]김순덕/한때 사랑했던 YS

  • 입력 1997년 5월 29일 08시 42분


개인적인 얘기를 해서 안됐지만 나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사랑뿐 아니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사람의 마음은 특히 그렇다. 이때문에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 혼자 그렇게 주장하는게 아닌 모양이다. 우리 민족의 특성이 결코 은근과 끈기는 아닌 것 같다. 요즘 대통령에게 겨누어지는 시퍼런 칼날같은 눈길들을 보면 나는 사랑이 끝난 뒤의 잔인함과 추악함을 보는 것 같아 착잡해진다. 5년전 우리가 그에게 거의 맹목적으로 쏟아부었던 애정을 기억하는가. 문민정부라는 화려한 수식어, 『이대한(위대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형편없는 발음에도 손바닥이 얼얼해지도록 쳐대던 박수, 틀림없이 「개핵(개혁)」을 이룰 것으로 여기던 뜨거운 믿음…. 그것들이 다 「거품 사랑」이었단 말인가. 안다. 대통령은 거의 모든 면에서 우리의 사랑과 기대를 배반했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부정직과 말바꾸기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시시때때로 말이 달라지면 신의를 잃는 법. 대통령이 하는 말이 하룻밤 사이에 표변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공직자의 공언을, 어른 말씀을, 애인의 달콤한 구애를 믿을 수 있나. 『한푼도 안받았다』고 했다가 『자료가 없어 못밝힌다』고 하던 대통령이 『이제부터 내 말은 진짜』라며 두루뭉실하게 『앞으로 잘하자』는 말로 끝낸다면 우리는 정말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 난감하다. 그런데도 문제는 우리 사이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매몰차게 돌아설 수 없다는데 있다.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정면돌파!』를 주장하던 「창조적 파괴력」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 믿은 것은 내 탓이니 내 발등을 찧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계약상」 임기를 채우기까지 아홉달이나 남아 있고, 그때까지는 미우나 고우나 뒤통수라도 보고 살아야 한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비록 마음은 돌아섰어도 당당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우리네 속내다. 매독이 무서워 정을 못주었으랴. 그래도 당시엔 진실했던 그 열정을 기억한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사랑해준 사람에 대한 마지막 예의다. 김순덕<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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