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워 또만나/반또 칼럼]냉전 강박증에 빠진 한국형 블록버스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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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정의(正義)는 이 나라 대한민국이야.”

대사를 듣는 순간 빵 터졌다. 아니, 웃겼다기보다는 안타까웠다. 내가 아는 백산 국장(김영철)은 이런 버터 냄새 풀풀 나는 말을 내뱉을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 최고의 비밀정보기관 NSS의 수장이자 군산복합체 테러조직 아이리스의 핵심 멤버로 한반도를 일촉즉발의 위기로 몰아넣던 백 국장이다. 그런 그가 언제부터 허접한 ‘낭만적 민족주의자’로 타락했단 말인가.

2009년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며 방영된 드라마 ‘아이리스’는 안방극장에 첩보액션 장르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인기를 이어 올해 2월부터 3개월간 시즌2가 방영됐다. 시즌2는 액션만큼은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게 정교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시즌1의 매력적인 악역 백 국장은 시즌2에서는 옛 부인과 친아들 앞에서 눈물을 쏟고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착한 남자로 변신했다. 시즌1의 뒷얘기만 제대로 끌고 갔어도 본전은 했을 것 같은 드라마가 어쩌다 이렇게 전락한 것일까.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 이데올로기로 시작해서 남북이 함께 외세에 맞서야 한다는 낭만적 민족주의로 마무리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클리셰를 ‘아이리스 시즌2’도 극복하지 못했다. 조직과 결별하고 대한민국을 택한 백 국장 캐릭터는 양면성을 잃어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반전을 집어넣어봤자 결말은 뻔했다. 진부한 설정에 피곤해진 시청자들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왜 그렇게 냉전과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걸까. 만들기 쉬운 데다 관객 호응도 좋다고 제작자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펙터클에 필요한 거대한 갈등 축을 설정하기 편하고 민족 감정을 자극해 눈물을 뽑아내는 데에도 유리하다. 영화 ‘쉬리’가 그랬고 ‘베를린’도 그랬다. 한때는 분명 성공 공식이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냉전과 민족주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클리셰였다. 그러나 무엇이든 지나치면 거부감이 드는 법이다. 요즘 시청자들은 뻔한 플롯과 진부한 캐릭터에 더이상 열광하지 않는다. 북한이 미사일을 쏜다고 해도 아이리스 시청률은 올라가지 않는다.

이제는 좀 어렵게 가도 되지 않을까. 앞으로는 제발 한반도 운명, 아니 한국 시청자의 애국애족 정신을 도발하는 ‘외세’ 악당들은 그만 봤으면 좋겠다. 스토리가 복잡하지 않아도 된다. 제임스 본드나 제이슨 본처럼 원맨쇼를 펼치는 것도 좋다. 냉전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가 걷힌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선하지 않을까.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반가워 또만나#강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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