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양심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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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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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구 무인도서관 실험 5개월새 책 75권 사라져

서울 성동구 왕십리역 광장에는 작은 무인(無人)도서관이 있다. 성동구가 2월 17일 이용자가 많지 않은 공중전화부스 1개를 KT링커스로부터 기증받아 도서관으로 개조했다. 2009년 영국 서머싯 주의 웨스트버리 서브 멘딥이라는 마을에서 시민들이 철거를 앞둔 공중전화부스를 1파운드(약 1800원)에 사들여 무인도서관으로 만든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성동구는 새마을문고 성동구지부가 기증한 소설 수필 교양서적 등 일반도서 100권과 동화책 100권 등 200권을 비치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책을 빌려 가는 대신 연락처와 책의 일련번호를 적은 대출 신청서만 대출 신청함에 넣도록 했다.

성동구의 실험이 시작된 지 166일째인 31일. 200권이 빽빽하게 꽂혀 있던 무인도서관 책장은 정상 대출된 50여 권을 포함해 절반 이상의 책이 사라진 채 텅 빈 상태였다. 5개월여 동안 이곳에서 분실된 책은 모두 49권으로 분실률은 24.5%다. 대출 신청서를 작성하지 않고 가져가 한 달 이상 돌아오지 않는 책을 분실된 것으로 간주해 센 것이다.

비치된 일반도서와 아동용 책의 비율은 반반이었지만 잃어버린 책 중 일반도서는 42권이고 아동용은 7권뿐이다. 어른을 위한 도서의 분실률이 아동도서보다 6배로 높은 것이다. 분실된 책은 이외수의 ‘하악하악’이나 ‘다빈치코드’ ‘해를 품은 달’처럼 베스트셀러이거나 ‘시간을 파는 상점’ 등 올해 출간된 신작 도서가 대부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올 3월 성동구청 앞에 공중전화부스 2개를 개조해 만든 2호 무인도서관(350권)의 분실률은 7.4%(26권)라는 점이다.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는 역 광장과 구청 앞이라는 위치 차이가 도서 분실률에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양심이 사라졌다. 서울 성동구 왕십리역 광장의 무인도서관. 개관 직후인 올 3월엔 책이 가득 차 있었는데(왼쪽), 31일 서가 곳곳이 빈칸이다. 책 200권 중 49권이 사라졌다(오른쪽).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양심이 사라졌다. 서울 성동구 왕십리역 광장의 무인도서관. 개관 직후인 올 3월엔 책이 가득 차 있었는데(왼쪽), 31일 서가 곳곳이 빈칸이다. 책 200권 중 49권이 사라졌다(오른쪽).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날 왕십리역을 지나던 최진수 씨(35)는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가져간 책을 반납하지 않는 것은 전형적인 양심불량”이라고 아쉬워했다. 이선화 씨(34·여)도 “아이들도 자주 오는 곳인데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어른들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무인도서관 같은 사업은 주인의식과 상호 신뢰의 기반이 튼튼한 공동체적인 특성이 있는 지역에서는 가능하지만 ‘익명성’에 숨으려는 사람이 많으면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시민들은 책 분실을 막기 위해 “모형 폐쇄회로(CC)TV를 설치해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자”거나 “‘우리 이웃을 위해 반납해 주세요’와 같은 안내 메시지를 책마다 붙여 놓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이에 구 관계자는 “시민의 양심에 맡기는 운영 방침을 바꿀 계획은 없다”며 “시민의 재산을 가로챈다는 건 결국 모두의 손해인 만큼 하루빨리 책을 반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성동구에 이어 송파구도 6월 29일 잠실 롯데월드와 KT송파지사 앞에 각각 2개의 공중전화부스를 개조해 무인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박진우 기자 pjw@donga.com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서형석 인턴기자 건국대 경제학과 3학년  
#성동구#무인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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