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가인재’ 장애인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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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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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SH공사 앞에서 6일째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이지훈(가명) 씨.
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SH공사 앞에서 6일째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이지훈(가명) 씨.
“2008년 12월 청와대에서 김연아 선수와 함께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뇌병변 1급인 이지훈(가명·28) 씨는 당시 김 선수가 앉은 테이블 뒤편에서 휠체어를 탄 채 이명박 대통령의 축사를 들었다. 이 대통령은 그날 “장애와 가난을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대학생”이라며 그에게 ‘대한민국 인재상’ 표창장을 줬다.

2년 반이 지난 지금 이 씨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SH공사 본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그가 탄 휠체어 아래에는 끼니를 때운 삼각김밥 포장지가 널려 있었다. 그는 13일부터 그곳에서 6일째 ‘노숙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피켓에는 ‘저는 오페라의 유령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팬텀은 장애 때문에 버려진 유능한 인재였습니다’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주인공은 음악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지만 화상으로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 앞에 나서지 못하고 음지에서만 생활한다. 오페라의 유령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비록 장애인이지만 양지에서 당당하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인재상 수상 이듬해 대학 총장상을 받고 대구 계명문화대 실용음악과(작곡과)를 졸업했다. 이 씨는 훌륭한 작곡가가 돼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을 위한 노래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이 씨가 살던 경북지역 장애인 시설에서는 “기술을 배워 취업하라”며 음악가의 꿈을 포기할 것을 강요했다. 자신이 만든 노래로 함께 무대에 설 밴드를 꾸리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할 때면 담당 복지사는 “음악으론 취업이 안 되고 자립도 못한다”며 타박하기 일쑤였다. 그는 “지금 사는 시설에서는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복지사들이 혼을 내고 때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복지사는 기자에게 ‘몸싸움’ 수준이라고 해명했다.

결국 이 씨는 2009년 4월 시설을 나와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처음에는 받은 상금으로 모텔 생활을 했지만 돈이 떨어지자 서울의 한 장애인 재활센터를 찾았다. 하지만 이곳도 서울에 있는 시설에 거주했던 사람만 입소할 수 있다는 규정때문에 들어가 살 수 없었다. 장애인용 임대아파트 입주도 문의했지만 부양가족이 없고 서울 거주 기간도 짧은 그에겐 ‘하늘의 별 따기’였다.

부모님은 살아계시지만 장애인이라 그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이 씨가 15세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장애인 시설에서 자란 것도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이었다. 결국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이 씨는 임대아파트를 분양하는 SH공사 본사를 찾았다.

그는 장애로 뒤엉킨 팔다리를 휘저으며 “이게 최선은 아니겠지만…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며 “나에게도 살 곳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월세 10만 원 안팎의 10평 남짓한 임대아파트 하나 얻는 게 소원”이라며 “잘 곳이라도 있어야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그는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았을 때 ‘저 같은 사람도 훌륭한 작곡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장애인들에게 보여주겠다’고 수상 소감을 말했다”며 “그때는 나도 영국의 4인조 록 밴드 핑크플로이드처럼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 씨는 “밥을 먹기 위해 하루 10시간씩 듣던 MP3플레이어를 팔았다”며 “지금은 잘 곳도 없이 하루하루 버티는 상황이어서 음악은 사치가 됐다”고 하소연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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