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주년]“전쟁터졌다” 생방송후 축구 관람…당시엔 충돌 잦아 안일하게 생각

  • Array
  • 입력 2010년 6월 23일 03시 00분


코멘트

6·25 발발-9·28 서울 수복 1보 뉴스 전한 KBS 아나운서 출신 위진록 씨

세월 지나며 모두 전쟁 잊어
北도발 가능성 항상 경계해야

재미교포 위진록 씨(82·사진)는 6·25전쟁에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을 중앙방송국(지금의 KBS) 아나운서로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처음 전했다. 9·28 서울 수복을 처음 알린 것도 그였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방한한 위 씨가 22일 기자에게 들려준 전쟁 첫날의 서울 분위기는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했던 당시 시민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위 씨는 일요일 오전 5시 10분쯤 당직 근무를 하다 군으로부터 ‘전쟁이 났다. 보도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위 씨의 상급자는 당시 육군 정훈감(대령)을 만나 “전쟁이 터졌다. 이미 (38선 아래쪽의) 개성이 함락된 것 같다”는 말을 직접 들은 뒤에야 방송을 결정했다.

위 씨는 오전 7시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두 차례 반복한 뒤 직접 쓴 짤막한 뉴스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북한군이 쳐들어왔다. 하지만 국군은 건재하다. 시민은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 보도를 마친 뒤 그가 한 일은 놀랍게도 축구경기 관전이었다. 위 씨는 “관중은 늘 그렇듯 ‘38선 지역에서 또 충돌이 일어났구먼’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전쟁이 터졌다’고 보도한 나도 축구장을 찾은 데다 친구들과 대포 한잔 할 생각을 했으니…”라고 말했다.

축구경기 도중 장내방송으로 ‘경기 중단’이 선언됐지만 시민들은 “재미있는데 왜 축구를 중단시키느냐”며 항의하기도 했다. 위 씨는 “당시 (상황을) 너무 몰랐고, 너무 안일했다”고 회고했다.

서울 점령 후 방송국 장악에 나선 북한군은 위 씨에게 ‘협력하겠다’는 취지의 전향서 작성을 강요했다. 위 씨는 방송국을 떠나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극작가 조남사, 연극배우 장민호 씨와 함께였고 경기도 어딘가로 영화배우 최무룡 씨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죽음의 집의 기록’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언젠가는 살아나갈 것이라는 한줄기 희망 때문에 도피생활의 절망을 견뎌냈다”고 말했다.

그는 9·28 서울 수복 이후 방송국으로 복귀했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방송국이 폭격으로 완파돼 미군의 지원을 받아 마포구 당인동 부근의 한 송신탑 건물에 임시 방송국을 차렸다. 서울 수복을 알리는 뉴스도 여기에서 나갔다.

위 씨는 이후 미군의 제안으로 그해 11월 일본 도쿄(東京)의 유엔군사령부에서 한반도를 겨냥한 방송을 시작했다. 미군은 그에게 “목소리가 (미국의 방송인) 월터 크롱카이트를 닮았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은 끝날 것’이라고 장담하던 미군은 그에게 “1개월만 방송해 달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그의 일본 체류는 늘어갔고 결국 22년간 일본 내 미군 방송국에서 일하다 197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위 씨는 “전쟁은 잊혀져 간다.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나도 잊어가고 있다. 그러나 후세에 전쟁의 의미를 남기는 것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이번 한국 방문을 통해 6·25전쟁의 현장을 다시 찾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