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방 만화방…도심 떠도는 ‘준노숙인’들과 하룻밤

  • 입력 2009년 8월 26일 19시 00분


24일 밤 12시경 서울역 근처의 한 PC방에서 ‘준노숙인’이 의자에 앉아 몸을 늘어뜨린 채 잠을 자고 있다. 피곤에 지친 듯한 남성 앞에 컴퓨터 모니터만 깜빡이고 있다. PC방 만화방 찜질방을 제 집 삼아 지내는 준노숙인은 해마다 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24일 밤 12시경 서울역 근처의 한 PC방에서 ‘준노숙인’이 의자에 앉아 몸을 늘어뜨린 채 잠을 자고 있다. 피곤에 지친 듯한 남성 앞에 컴퓨터 모니터만 깜빡이고 있다. PC방 만화방 찜질방을 제 집 삼아 지내는 준노숙인은 해마다 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25일 0시 서울역 인근의 한 PC방. 80여 석 중 50석 가량이 찼지만 그중 10여명은 의자에 길게 누운 채 자고 있었다.

"내일 일 나가? 요즘 수원에 일자리가 많다는데 같이 안 갈래나?"

인터넷 포커 게임을 하던 최모 씨(41)가 옆자리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근 인력사무소에 나가며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최 씨와 동료들의 집은 이곳 PC방이다. 이 PC방 선불카드에 15시간을 충전하면 1만 원 밖에 되지 않는다. 대략 이틀을 지낼 수 있다. 거리에서 잠을 자지 않으니 노숙인은 아니지만 거처가 일정하지 않고 근로 의지가 꺾이면 노숙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준 노숙인'이다.

최 씨의 동료 조모 씨(38)는 4년 전까지 서울 충무로의 인쇄공장 기술자였다. 박모 씨(34)는 외환위기 전까지 경기 안산 반월공단의 원단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이 문을 닫고 4년여 전세, 월세방을 전전했지만 보증금마저 까먹자 PC방을 전전하는 준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가 준 노순인 120명을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10명 중 3명은 비주거용 거주지에서 5년 이상 생활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남기철 교수는 "PC방에서 자고 아침에 공용화장실에서 씻고 일하러 가는 사람들도 노숙인이나 마찬가지"라며 "저렴한 주거지가 재개발로 줄어들면서 그 수가 늘고 기간도 장기화된다"고 말했다.

서울역 인근 PC방 3곳, 만화방 3곳은 가게마다 30~80명의 사람들이 밤마다 이렇게 모여 들어 잠자리를 해결한다. 노숙인 관련 단체는 서울역 영등포역 인근의 준노숙인만 수백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이 PC방, 만화방에서 잠을 자는 것은 값이 싸기 때문이다. 또 쉬면서 게임을 하거나 만화를 볼 수 있으며 동료들과 일자리 정보 등을 나눌 수 있다.

"나흘 전에 여주 공사장 갔다 왔어. 원래 일당이 7만 원인데 소개비 7000원 떼고, 교통비 떼고, 이렇게 떼고 나면 5만8000원밖에 남지 않더라구." 최 씨는 인력사무소의 수수료가 높다고 불평하며 "막노동 보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라고 말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오전 4시 반. 동료가 인력사무소에 나가자며 잠든 최 씨를 깨웠다. 근력이 좋고 성실한 사람은 인력사무소 직원이 PC방으로 찾아오거나 전화를 해 일을 나오라고 한다. 막노동을 한 날에는 1만~1만 5000원 가량의 쪽방에서 자며 쉬지만 다음날에는 다시 PC방이나 인근 성공회대 다시서기센터 등 노숙자 쉼터를 찾는다. 고등학생 딸이 복지시설에서 생활한다는 조 씨는 "집 한 칸 마련해서 헤어진 딸과 같이 사는 것이 꿈"이라며 "지금은 하루 벌어 하루 살지만 돈을 꼭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24일 새벽에는 노숙인들이 주로 묵는 서울역 인근 만화방을 찾아 하룻밤을 같이 묵었다. 만화방은 건물 2,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층에서 한층 더 올라가니 군대 내무반처럼 생긴 66㎡(20평)의 수면실 2칸에서 25 명의 준 노숙인들이 잠을 자고 있다. 장판 위의 한사람 당 3.3㎡(1평)도 안되는 공간이 이들의 방인 셈이다. 건설교통부 고시 최저주거기준은 가구원수 1인인 경우 침실은 1개, 총 주거면적은 12㎡(약 3.6평)이지만 이들과는 상관없는 얘기다.

만화방은 세탁기와 온수기 이불 등을 갖췄다. 벽의 빨래줄과 옷걸이에는 겨울옷과 세탁한 옷, 수건들이 줄지어 걸렸다. 4000원을 내면 오후 10시부터 오전9시까지 잘 수 있다. 3~8년을 산 만화방 '식구' 20명은 한달에 15만 원을 낸다. 아예 주민등록 주소지가 이 만화방인 사람도 있다.

선풍기 3대가 밤새 돌아갔지만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여름밤의 더위를 달래기에는 부족했다. 일을 하다 다친 듯 정강이에 새로 딱지가 앉은 한 30대 남자는 기침과 잠꼬대를 되풀이했다. 그의 가슴에는 박봉성 만화 '강철의 승부사'가 놓여있었다. 건너 칸에서 복도를 거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화장실의 오물냄새가 확 끼쳤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기자뿐이었다.

류정순 한국빈곤문제연구소장은 "경제난으로 해체 가구가 늘고 저소득층의 임대료 부담능력이 줄면서 비거주용 주거지에서 사는 사람들이 늘었다"며 "저렴한 임대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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