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의욕, 새 감각, 새 아이디어.’ 동아방송의 출발정신은 ‘새로움’이었다. 1963년 4월 25일 개국한 동아방송은 창의적인 프로그램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다른 방송국의 인기 프로그램을 답습하기보다 정형화된 틀을 깬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프로그램으로 경쟁력을 확
“여기는 동아방송 DBS입니다. 동아의 첫 뉴스를 전해드리겠습니다.” 1963년 4월 25일 오전 5시 30분 동아방송이 쏘아올린 첫 전파는 뉴스와 함께 시작했다. 동아방송 뉴스는 ‘격조 높은 민족의 방송’을 표방한 동아방송의 색깔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분야였다. 동아일
《창간 당시부터 민족의 역량 제고에 힘을 쏟았던 동아일보는 사세가 안정되면서 곧바로 체육 활동을 통한 민족혼 고취와 사회계몽에 눈길을 돌렸다. 1923년 여자정구대회를 창시한 것을 시작으로 1926년 4개 구락부 야구연맹전, 1929년 조선수영경기대회, 1931년 마라손(마
1920년 5월 4일 저녁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 인파가 몰려들었다. 일본의 여성 성악가 야나기 가네코(1892∼1984)의 독창회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이 공연은 한국 최초의 실내 서양음악 연주회였으며 동아일보가 주관한 첫 문화행사이기도 했다. 가네코는 ‘
《창간과 함께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의 3대 사시를 내걸었던 동아일보의 90년은 민족 문화역량 제고와 육성을 위한 노력의 90년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신춘문예로 대표되는 각종 문예공모로 민족문예 부흥과 인재 발굴을 함께 꾀했으며 광복 후에는 동아음악콩쿠
“동아일보의 거룩한 창간 전통에 다시 한 번 중흥의 불을 댕기는 제2의 창간을 이룩해야겠다는 결의를 밝힙니다.” 1989년 3월 25일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한 화정 김병관(1934∼2008)은 4월 1일 취임사에서 동아일보의 제2창간을 주창했다. 이전까지는 권력의 횡포를 억지
‘물고문 도중 질식사.’ 충격적인 제목이 1987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로 올랐다.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사망이 수사관의 물고문 때문이었음을 인정하는 경찰의 공식 발표와 함께 사건의 전모를 전하는 기사였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폭군이 있는 곳에 노예가 있고 노예 되기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폭군이 설 땅이 없다…4·19혁명 스무 돌…자유의 나무가 얼마나 자랐을까. 이렇게 생각할 때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길이 없다…80년 4월 19일 아침부터 모진 비바람이 역사의 현장, 세종로 네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