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극복한 작은 베토벤, 영재 피아니스트

  • 입력 2009년 4월 12일 19시 45분


선근이는 로봇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어날 때부터 앓아온 자폐증 때문에 배가 고프고 짜증이 난다거나 하는 동물적인 느낌 말고는 감정이 없었다. 그러던 선근이가 어느 날 베토벤을 듣고는 아기처럼 울었다. 슬프다고 했다. 기쁨도 슬픔도 못 느끼던 선근이가 베토벤을 듣고 길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던 일이 떠오른다며 울었다. 눈치 없고 늘 뾰로통한 아이에게 따뜻한 마음을 주고 싶었던 엄마도 따라서 울었다.

송선근 군(16)은 7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자폐증 때문에 손가락 근육 등 작은 근육이 약해 젓가락질, 글씨쓰기를 어려워하자 어머니 이수진 씨(41)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갈 무렵, 선근이는 피아노를 통해 감정을 느끼게 됐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 끔찍한 교통사고 장면을 봐도 몸 개그 프로를 본 것처럼 깔깔대며 웃던 선근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곡을 연주하고 나면 옆에 앉은 어머니가 마음에 들어 하는지 눈치를 볼 정도가 됐다.

선근이는 영화 '레인맨'의 주인공처럼 자폐증을 앓지만 뛰어난 천재성을 가진 '서번트 증후군'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어머니 이 씨는 "천재가 아닌 선근이가 자폐증까지 끌어안고서 다른 아이들과 경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피아노를 치는 건 손이라지만 음악 이론을 이해하지 못해 곡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죠." 인지능력이 부족한 선근이에게는 꾸준한 연습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와서는 입시준비를 위해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곡을 200번씩, 4시간 연습을 했다.

그렇게 연습을 거듭해 이제는 피아노를 전공한 교수들도 인정한 영재 피아니스트가 됐다. 서울시와 건국대가 지원하는 장학교육 프로그램 '2009 건국 음악영재 아카데미'에 당당히 실력으로 합격한 것. 장애가 없는 학생 210명과 겨뤄 3대1의 경쟁률을 뚫었다. 11월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건국대 음악교육과 교수들에게 일대일 레슨을 받고 주말에는 세계 유명 음악가들을 초청한 마스터클래스, 자신감을 키워주기 위한 멘토링 프로그램도 참가하는 좋은 기회다.

11일 영재 아카데미 입학식을 치른 선근이에게 건국대 음악교육과 최은식 교수는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때는 결국 누구나 혼자"라며 "자폐가 있는 선근이는 오히려 내면에 천착(穿鑿)해 더욱 깊이 있는 연주를 한다"고 평했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관악기 유포늄 등 다른 악기도 곧잘 연주하게 됐다. 선근이는 현재 자폐증 등 발달장애를 가진 청소년들로 구성된 '하트-하트 윈드 오케스트라'에서 유포늄을 맡아 연주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미국까지 가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그런 선근이지만 지난해 예고 입시를 준비할 때는 번번이 좌절을 겪었다. 내신 성적 때문이었다. 어머니 이 씨는 "지원 제한을 두지 않았다고 해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평가를 한다는 건 뇌성마비를 가진 아이에게 100m를 10초 안에 뛰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는 억지와 같다"며 아쉬움을 토했다. 결국 선근이는 일반계고로 진학해 학교가 끝나면 피아노 연습에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는 고교 생활을 하게 됐다.

선근이가 가장 자신 있는 곡은 베토벤의 작품들이다. 선근이는 자신처럼 베토벤도 장애를 극복한 피아니스트라는 걸 잘 알지 못한다. "몰라. 베토벤 그냥 좋아요" 선근이는 긴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신민기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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