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국회의장 욕보인 판사

  • Array
  • 입력 2010년 1월 18일 20시 00분


코멘트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의 ‘국회 폭력’에 대한 서울남부지법 이동연 판사의 무죄 선고는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강기갑 무죄’에 가려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충격적인 사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국회의장의 질서유지권 발동을 적법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 판사는 “작년 1월 당시 국회 본회의가 열릴 가능성은 전혀 없었고, 따라서 국회 본회의 개최와 무관하게 발동된 질서유지권은 그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밝혔다. 따지고 보면 강 대표의 각종 혐의에 대한 일체의 무죄 선고도 그 출발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즉 강 대표의 국회 경위 폭행이나 국회사무총장실에서의 ‘공중부양’, 기물 파손은 적법하지 않은 질서유지권 발동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행위이기 때문에 죄가 안 된다는 논리다.

국회법 145조는 ‘의원이 본회의 또는 위원회의 회의장에서 이 법 또는 국회규칙에 위반하여 회의장의 질서를 문란하게 한 때에는 의장 또는 위원장은 이를 경고 또는 제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판사는 이 조항에 초점을 맞춰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시엔 본회의가 열리지 않았고, 민노당 사람들이 점거농성을 벌인 곳도 본회의장 앞이었다. 이 조항만 액면 그대로 놓고 본다면 그렇게 판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회법에 국회의장의 질서유지 권한을 규정한 조항이 비단 145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괄적으로 ‘국회의 질서 유지’를 국회의장의 직무 중 하나로 규정한 10조도 있다. 또 143조는 ‘회기 중 국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의장은 국회 안에서 경호권을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 국회법에는 질서유지권이라는 용어는 없고 경호권이란 용어만 있다. 경호권을 넓은 의미의 질서유지권으로 본다면 당시 국회의장의 행위는 적법한 것이었다. 본회의가 열릴 가능성이 없다 하더라도 여야 합의로 12월 임시국회가 진행 중이라 분명 ‘회기 중’이었고, 회의장은 아니더라도 ‘국회 안에서의’ 질서 유지가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45조뿐만 아니라 10조와 143조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했다면 부적법 판결이 나왔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상황’이라는 변수도 무시할 수 없다. 당시로서는 회의를 열고 싶어도 야당의 물리적 저지 때문에 열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국회 운영을 저해하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기초적인 조치로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것이라면 당장 회의가 열리고 안 열리고를 떠나 정당한 권한 행사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국회에서 정상적인 의사(議事) 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법의 문제 이전에 대의민주주의의 근본에 관한 문제다. 소수 의견의 존중과 소수의 저항권도 그 범위 안에서만 용인될 수 있는 가치다. 이런 상식에만 근거했어도 그런 판결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질서유지권에 대한 시비는 국회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편이 옳았다고 본다.

이번 판결로 국회의장과 국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생겼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어느 정당에서, 누가 국회의장을 맡더라도 질서유지권을 발동하려면 사전에 일일이 법원에 가부(可否)를 물어봐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국회와 국회의장 모두 ‘꿀 먹은 벙어리’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인가, 알고도 사법부와의 마찰을 피하려고 일부러 가만히 있는 것인가.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