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조준모]스펙 쌓기에 시드는 대학생활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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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고3 아이 때문에 서울 강남의 대치동에 있는 한 학원을 방문했다. 강의실에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강사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중 한 대학 출신이고 올림피아드 금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억대를 벌어들이는 그는 학생들의 수능 점수를 끌어올려 국가에 기여한다고 자부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학원이 아니라 국가 연구개발(R&D) 핵심인력으로 능력을 발휘한다면 더 큰 기여를 할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은 84%로 일본의 50%(2008년 기준), 미국의 67%(2004년 기준)를 넘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다. 1990년 33.2%, 2000년 68%로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였다.

그렇지만 막상 대학에 입학해서도 취업 스펙을 쌓기 위해 5년 다닌다고 해서 ‘대오족(大五族)’이라는 말이, 토익 공부 때문에 ‘토폐인’이라는 말이 생겼다. 고시시험 보는 고시족(族)으로 노량진과 신림동의 학원가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학생들은 어학연수와 해외봉사 등으로 이력서 스펙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천신만고 끝에 취직한다고 해도 탄탄대로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30대 후반이면 ‘38선’, 40대 중반이면 ‘사오정’이라는 고용불안이 찾아온다. 설상가상으로 가장이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시기에 자식들의 사교육비 부담은 정점에 이르게 된다.

과잉 학력사회가 부른 노인빈곤

얼마 전 직장 동료들과 식사를 하다가 아이비리그 대학 티셔츠를 입고 술을 드시는 노인 한 분과 합석하게 되었다. 그분은 자식들 또한 미국 명문대학을 졸업했다며 자식자랑을 하다가 “지금은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물었더니 혼자 외로이 산다며 한숨을 내쉬셨다. “임종할 때 이기적인 자식들이 올 것 같지 않다”며 이내 푸념조로 돌변했다.

높은 교육열은 과거 고도성장의 기반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회문제와 얽혀 복합증후군을 유발하고 있다. 교육비 부담이 너무 높아 노인빈곤화로 이어진다. 이공계 등 실용학문 기피현상을 유발해 교육투자의 비효율성을 증폭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서 추진하는 학원 야간수업 금지, 세금포탈 적발은 근원적 해법이 될 수 없고 바위에 계란 던지기 같아 보인다.

인적자원 정책이 시장을 유도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원자들이 만드는 스펙에 안주하는 편의주의와 획일주의에 빠져 있다. 산업, 고용과 연계된 종합적인 시각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첫째, 국가 인적자원 운용을 학벌 위주에서 직무능력 위주로 개혁해야 하며 공공부문이 이를 선도해야 한다. 1급 이상 공직자 62%가 SKY대학 출신으로 편중된 현실도 대다수 대학생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일본의 삼류대학을 나와 창고에서 창업해 13만 명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일본전산 나가모리 시게노부 사장은 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한국이 잘되려면 젊은이들의 선택지가 많아야 하는데 한국엔 선택지가 극단적으로 적어요. 공부 열심히 해서 가는 데가 삼성 LG 현대뿐이라면 세상이 재미없지 않아요? 대기업에 입사하는 사람은 만족해도 대기업에 못 들어가는 젊은이는 희망이 없어요. 저 같은 삼류대학 출신,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에게도 사회가 꿈을 주어야지요.” 나가모리 사장의 말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전문계고나 지방대학 졸업자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다양한 성공트랙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둘째, 직장체험, 기업·지역단위의 일자리 프로젝트, 창업 인큐베이터 참여 등 노동시장 진입 직전단계에서 다양한 진로탐색과 근로생애 모색이 가능하도록 종합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이런 인프라가 갖추어지면 획일적이고 불필요한 스펙을 갖추기 위해 낭비되는 비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정부는 대학생 총원 조절을 위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상당수 전문계 고교가 본연의 전문교육을 소홀히 하고 대학진학에 매달리는 파행도 대학의 과잉공급이 빚은 부작용이다. 경쟁력 없는 학교의 퇴출은 용이해져야 한다. 대학총원 조절 없이는 정부가 추진하는 마이스터고교도 한계에 봉착할 수 있다.

진로탐색 종합 인프라 갖춰야


넷째, 글로벌 노동시장에서 청년 일자리를 확보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인도의 정보기술(IT) 인력이 미국 실리콘밸리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청년인력의 해외 진출이 활성화하면 청년일자리 부족 문제 해소에 기여할 수 있다. 몇 년 전 미국이 간호사 인력을 한국에 요청했을 때도 간호사는 많아도 영어 잘하는 간호사는 부족했다. 산업, 고용, 교육이 연계된 종합대책을 수립하지 않고, 국내에서 취직 못한 청년들의 해외취업을 국가가 알선해 온 단편적인 정책의 결과이다.

조준모 객원논설위원·성균관대 교수·경제학 trustcho@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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