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따라 일렁이는 물결에 햇빛이 반짝이는 어느 연못. 이 연못 가장자리로 나이 든 화가가 일꾼과 함께 손수레를 끌고 다가옵니다. 수레에 가득 실린 캔버스와 이젤이 차례로 물가로 내려지며 빈 캔버스들이 마치 조그마한 댐처럼 연못을 에워쌉니다.그림 그릴 준비를 마친 화가는 분주하게 8개의 캔버스를 오가며 각기 다른 장소에서 본 연못을 그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화가는 이런 식으로 연못의 모습을 30년 넘게 그려 무려 250점을 남겼습니다. 바로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입니다.꽃이 핀 수족관에 있는 듯모네가 수련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모네는 파리를 떠나 약 75km 떨어진 근교의 농촌 마을 지베르니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1883년 처음 지베르니에 정착할 때는 이 집을 임차해 살았지만 점점 형편이 나아져 집을 매입하고 그 옆 땅도 사면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습니다.이때 모네의 나이가 50세. 청년 시절엔 인상파 그림이 인정받지 못해 가난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
오늘은 오랜만에 미술 시장 소식을 전합니다. 지난주 금요일인 2월 7일, 아트바젤 홍콩 디렉터인 앤젤 쓰양-러가 한국 언론을 상대로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 그간 아트바젤 홍콩은 디렉터가 조용히 방문해 몇 개 매체와 개별 인터뷰를 진행한 적은 있었지만 기자 간담회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이례적이고 적극적인 행보에 미디어의 관심과 궁금증도 커졌습니다. 디렉터와 인터뷰로 아트바젤 홍콩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기자간담회가 끝나고 만난 쓰양-러는 2022년부터 디렉터로 선임되었는데, 이 때 아트바젤 홍
“우리 집 입구에 걸려있던 이 그림은 상반신 누드의 젊은 남자를, 그 몸에서 초자연적인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이 남자는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진정한 너 자신이 되라’고 부추기는 듯 했다.거짓으로 꾸며낸 페르소나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림 속 남자의 눈을 충분히 오랫동안 바라본다면,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이 글은 오스트리아의 화가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세미 누드 자화상’을 본 감상입니다. 이 감상을 남긴 사람은 소장가인 루돌프 레오폴드의 아들인 디트하르트 레오폴드.루돌프 레오폴드는 게르스틀의 자화상 두 점을 집에 나란히 걸어 두었고, 아들 디트하르트는 어린 시절 보았지만 여전히 생생한 그 때의 느낌을 글로 적습니다.이후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품이 된 이 작품은 지금 한국 관객을 만나고 있습니다.디트하르트가 어린 시절 이 작품의 강렬함에 시선을 빼앗긴 것처
여기 피리를 부는 소년이 서 있습니다.소년의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오므린 입술은 그가 연주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피리를 따라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소년의 손가락 하나가 올라와 있고, 수직으로 올라간 시선은 그 아래 금관 악기로 이어집니다. 이 흐름을 소년이 두르고 있는 흰 띠가 부드럽게 감아올리죠.이 그림에서 이렇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흐름을 만드는 요소는 더 있습니다.소년이 입고 있는 재킷의 나란히 달린 금장 단추, 모자의 장식이 만드는 V 모양, 바지의 옆단에 붙은 검은 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살짝 내민 왼발이 있죠.이 왼발이 그림 모서리로 향하며 마치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을 줍니다.공중에 떠 있는 사람이 작품은 인상파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에두아르 마네가 1866년 그린 ‘피리 부는 소년’.1914년부터 1947년까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다가 1986년 오르세 미술관의 소장품이 된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죠.이 그림에서 생동감을 만드는 여
여기 피리를 부는 소년이 서 있습니다. 소년의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오므린 입술은 그가 연주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피리를 따라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소년의 손가락 하나가 올라와 있고, 수직으로 올라간 시선은 그 아래 금관 악기로 이어집니다. 이 흐름을 소년이 두르고 있는 흰 띠가 부드럽게 감아올리죠. 이 그림에서 이렇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흐름을 만드는 요소는 더 있습니다. 소년이 입고 있는 재킷의 나란히 달린 금장 단추, 모자의 장식이 만드는 V 모양, 바지의 옆단에 붙은 검은 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살짝 내민 왼발이 있죠. 이 왼발이 그림 모서리로 향하며 마치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을 줍니다.공중에 떠 있는 사람 이 작품은 인상파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에두아르 마네가 1866년 그린 ‘피리 부는 소년’. 이 그림에서 생동감을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소년을 감싸고 있는 텅 빈 배경입니다. 이 작품에서 마네는 ‘배경을 채우고 싶은 욕심’을
구스타프 클림트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이 ‘여인들의 초상화’입니다.클림트는 의뢰로 사교계 여성을 그리는가 하면, 상징에 빗댄 여자들의 누드를 그리고, 작업실에서는 이런 누드화의 모델을 선 여자들의 적나라한 포즈를 그렸습니다.생전 클림트는 “나라는 사람은 흥미로울 구석이 하나도 없다”며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림을 봐달라”며 사생활을 숨기려 했죠.그러나 수많은 여인을 그림으로 남긴 데다, 세상을 떠난 뒤 ‘숨겨둔 자식’들 10여 명이 유산을 요구하며 나타나 ‘클림트의 여인들’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 이야깃거리입니다.오늘은 그 중 평생 클림트와 함께했던 여인이자 ‘키스’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뮤즈, 에밀리 플뢰게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바람둥이’ 클림트 눈 감아준 헌신적 여자?클림트와 플뢰게는, 클림트의 동생과 플뢰게의 언니가 결혼하며 사돈 관계로 알게 됩니다.클림트가 29세 젊은 화가일 때, 17세인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을 그렸는데, 가족이나 주변 사람을 모델로 흔히 그
1897년 오스트리아 빈.전통적인 아카데미 예술이 아닌 ‘새로운 예술’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구스타프 클림트를 대표로 선출합니다. 여기엔 건축가 요셉 호프만, 디자이너 콜로먼 모저도 함께 있었죠.‘시대에 맞는 예술’을 보여주겠다는 이들의 꿈은 20년도 이어지지 못하고 잿더미가 됩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수많은 사람이 각기 다른 꿈을 꾸었던 대도시 빈. 이곳의 예술 작품과 그 안에 담긴 여러 겹의 사회상을 소개합니다.극적인 탐미주의, 클림트빈 예술가들이 새로운 예술을 모색한 된 계기는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예술이었습니다.다만 이들이 추구했던 예술은 ‘신성한 봄’(빈 분리파가 발간한 저널)이라는 말처럼 다소 모호합니다.같은 시기 후기 인상파 작가인 세잔이나 고갱이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면, 클림트의 작품은 장식적인 경향이 강합니다.키스, 연인, 삶과 죽음 같은 소재는 추상적이고 드라마틱하죠.이 때문에 불과
1897년 오스트리아 빈. 전통적인 아카데미 예술이 아닌 ‘새로운 예술’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구스타프 클림트를 대표로 선출합니다. 여기엔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도 함께 있었죠. ‘시대에 맞는 예술’을 보여주겠다는 이들의 꿈은 20년도 이어지지 못하고 잿더미가 됩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각기 다른 꿈을 꾸었던 대도시 빈. 그곳의 예술 작품과 그 안에 담긴 여러 겹의 사회상을 소개합니다.극적인 탐미주의, 클림트 빈 예술가들이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게 된 계기는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예술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이 추구했던 예술은 ‘신성한 봄’(빈 분리파가 발간한 저널)이라는 말처럼 다소 모호합니다. 같은 시기 후기 인상파 작가인 세잔이나 고갱이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면, 클림트의 작품은 장식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키스, 연인, 삶과 죽음 같은 소재는 추상적이고 드라마틱하
에드바르 뭉크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20세기 모나리자로 불리는 작품 ‘절규’에는 연필로 쓴 글씨가 있다는 것 알고 계신가요?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절규’(1893년) 이야기입니다. 글씨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미친 사람만이 그릴 그림’뒤늦게 발견된 이 글씨를 누가 썼느냐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미스터리인데요.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연구팀이 재개관을 준비하며 그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글씨를 쓴 범인은 바로 뭉크였습니다.‘나는 미친 사람인가?’이 글씨가 뭉크의 필적이라는 여러 가지 근거 중 하나는 1895년 어느 모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뭉크는 이 때 ‘절규’를 오슬로의 갤러리에 전시합니다. 전시에 관해 학생 토론회가 열린 밤, 한 의대생이 뭉크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저는 이 작품을 그린 사람의 정신 상태가 의심됩니다.”뭉크는 이 말에 큰 상처를 받습니다. 몇 십년이 지났을 때도 이 때 일을 곱씹으며 일기에 적었을 정도로 말이죠.자신의 그림을 폄하
1606년 어느 날 밤 이탈리아 로마. 테니스 코트에서 남자들이 싸움을 시작합니다.누군가가 칼을 꺼내고, 도망치던 남자는 허벅지를 맞아 쓰러집니다. 피가 흐르자 지켜보던 사람들도 가담해 4명 대 4명이 맞붙는 패싸움으로 번지는데….이날 1명은 목숨을 잃고, 칼을 꺼냈던 남자는 죽을 때까지 도망자로 살게 됩니다. 도망자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란 이름으로 유명세를 떨친 화가였습니다.이탈리아 법정 기록과 기사로 남겨진 이 사건으로 카라바조에겐 수백 년간 ‘광기의 화가’, ‘악마의 재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어떤 역사가는 그를 ‘그림 실력은 있었지만 높은 지성은 없었다’고 평가했죠. 카라바조는 정말 미친 재능을 감당하지 못한, 광기의 화가였을까요?야만의 시대, 17세기카라바조가 살인에 이르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 반격했다는 기록, 상대방도 칼을 꺼내 친구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기록 등이 엇갈립니다.이외에 길거리나 식당에서 시비가 붙거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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