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조선시대보다 일제 치하가 낫다고? 참 딱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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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년 8월 13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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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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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학정 아래서 신음했던 한민족이 그보다 훨씬 나은 일제 총독정치에 왜 불만인가?’라고 생각한 일본인들이 있었습니다. 1953년에 한일협정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는 “일본은 36년간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라고 했죠. 지금도 있습니다. 일본인들만 그럴까요? 우리 주변에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일제가 다리도 놓아주고 철도도 깔아주고 공장도 세워주지 않았나’라는 주장 말이죠. 벌써 90년 전에 이런 주장에 ‘정말 그 어리석음을 딱하게 여길 뿐이다’라고 코웃음 친 이가 있었습니다.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였죠. 송진우는 1925년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제목의 10회 연속 사설을 쓰면서 ‘총독정치 옹호론’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 2005년 8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사설을 10회 연재했다. 1회 사설의 본문과 함께 2~10회 사설의 제목을 한데 모았다.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 2005년 8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사설을 10회 연재했다. 1회 사설의 본문과 함께 2~10회 사설의 제목을 한데 모았다.
당시 일본인들은 총독정치 아래서 조선시대보다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두둔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조선왕조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체제이고 조선민족, 즉 한민족은 군소리도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죠. 송진우는 이 점을 짚었습니다. ‘현대의 조선인은 과거의 조선인이 아니며 만약 이조의 학정이 현대에 재현된다고 하면 조선인들은 개혁을 절규할 것’이라고 말이죠. 그는 일본인 너희들도 과거의 전제정치에 반항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했습니다. 그 점만 떠올려도 ‘총독정치 우월론’을 반성해야 한다고 했죠. 물론 송진우는 무조건 한민족이 과거와 다르다고 주장하진 않았습니다. 근거를 제시했죠. 바로 3‧1운동이었습니다.

왼쪽은 1925년 6월 30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1회 태평양회의 참석자들. 조선 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는
 이 회의에서 얻은 견문과 교류의 결과를 토대로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10회 사설을 집필했다. 오른쪽은 힐로트리뷴헤럴드 
1925년 7월 26일자 기사로 태평양회의에 참석했던 서재필의 동정을 소개하고 있다. 출처는 독립기념관.
왼쪽은 1925년 6월 30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1회 태평양회의 참석자들. 조선 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는 이 회의에서 얻은 견문과 교류의 결과를 토대로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10회 사설을 집필했다. 오른쪽은 힐로트리뷴헤럴드 1925년 7월 26일자 기사로 태평양회의에 참석했던 서재필의 동정을 소개하고 있다. 출처는 독립기념관.
송진우가 보기에 3‧1운동은 한민족 혁신운동사상 거대한 기적이자 위대한 현상이었습니다. 과거의 개혁과 전란은 소수계급의 정권쟁탈이 아니면 쇄국양이 사상이 표현됐을 뿐이라고 했죠. 가까이는 ‘갑신정란’이 그랬고 ‘갑오동란’ 역시 그렇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경술국치가 일어나 일제의 동화정책이 한민족을 짓눌렀다고 했죠. 그러나 반만년 이어진 민족의 내재적 생명은 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세계의 신문화를 접하면서 마침내 폭발했다고 했죠. 거족적 3‧1운동으로요. 이제 우리 민족은 새 기운을 얻고 새로운 빛을 보았습니다. 시골 도시 할 것 없이 너도나도 교육을 받으려 하고 경제생활에 집중하게 된 의식의 변화가 종전의 개혁과는 현격하게 다른 요소라고 했죠.

동아일보는 1923년 12월부터 1면에 외신 기사를 비중있게 싣기 시작했다. 강대국이나 식민지 약소국의 움직임을 빠르게 전달하고 
시사점을 얻기 위한 조정이었다. 1면 만평에도 세계 동향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실렸다. 그림은 1925년의 미국과 일본의 동향을 
보여준 대표적인 만평 3개.
동아일보는 1923년 12월부터 1면에 외신 기사를 비중있게 싣기 시작했다. 강대국이나 식민지 약소국의 움직임을 빠르게 전달하고 시사점을 얻기 위한 조정이었다. 1면 만평에도 세계 동향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실렸다. 그림은 1925년의 미국과 일본의 동향을 보여준 대표적인 만평 3개.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연속 사설은 진단과 전망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지금 읽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니까요. 송진우가 제1회 태평양회의를 다녀오면서 얻은 견문과 교류의 결과를 집대성한 ‘작품’인 셈입니다. 먼저 세계적으로 민족운동과 노동운동이 맹렬하게 확산되는 점을 중시했죠. 발칸반도 여러 나라를 비롯해 폴란드 핀란드 이집트가 독립하고 아일랜드는 자유국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소련의 성립이 말해주듯 각국에서 노동운동의 비중 역시 커졌습니다. 일본이 점점 위축되는 점도 놓치지 않았죠. 중국에 21개조를 들이밀고 시베리아에 대규모 출병을 감행한 무리수가 강대국들의 눈 밖에 났습니다. 결국 미국과 일본이 맞붙고 나아가 미국과 소련이 충돌한다고 정확하게 예견했죠.

왼쪽은 1965년 간행된 '고하 송진우 선생전'에 실린 송진우 사진. 가운데는 송진우가 1924년 남강 이승훈의 회갑 기념 서화첩
 첫머리에 쓴 축사. 오른쪽은 1922년 3월 중앙고보 제1회 졸업기념식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김성수 최두선 송진우 
현상윤(왼쪽부터).
왼쪽은 1965년 간행된 '고하 송진우 선생전'에 실린 송진우 사진. 가운데는 송진우가 1924년 남강 이승훈의 회갑 기념 서화첩 첫머리에 쓴 축사. 오른쪽은 1922년 3월 중앙고보 제1회 졸업기념식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김성수 최두선 송진우 현상윤(왼쪽부터).
물론 이 사설에는 결점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혈통이 극히 순수하고 언어 예절 풍속이 다른 민족에 비해 항상 탁월 우수했다는 민족지상주의는 지금 볼 때 거슬립니다. 3‧1운동 이후 10년이 되는 1929년이면 태평양에서 격돌이 일어나리라는 예측은 희망이 과도하게 스며든 조급성이었죠. 그렇긴 해도 송진우는 당장 준비해야 할 요소로 ‘사상적 수련’과 ‘민족적 단결’을 꼽았습니다. 먼저 복잡한 사상을 정리 통일해야 하고 그 위에서 중심적 단결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죠. 정세의 변화에 의지하거나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기보다 민족 자체의 단합으로 앞날에 대비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이 민족주의적 해법을 곧 실천에 옮깁니다.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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