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수백년 고목 벗삼아 과거여행 즐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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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1일 03시 00분


서울 덕수궁에서 소나무를 어루만지던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건조가 잘된 나무로 지은 목조건물은 천년 세월도 너끈히 견뎌낸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서울 덕수궁에서 소나무를 어루만지던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건조가 잘된 나무로 지은 목조건물은 천년 세월도 너끈히 견뎌낸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박상진 글·사진/412쪽·2만3000원·왕의서재

‘우리 문화재 나무…’ 펴낸 박상진 교수
“수백년 고목 벗삼아 과거여행 즐기죠”


《“고목(古木)에 눈을 감고 등을 기대 보세요. 그리고 나무에 얽힌 전설과 역사를 떠올려보세요. 나무가 과거의 현장으로 안내할 겁니다.” 이 책을 쓴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69)는 나무박사다. 전공은 목재조직학. 나무의 세포를 연구하는 분야다. 하지만 그는 ‘궁궐의 우리나무’,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등 나무와 문화재를 연결한 책을 여러 권 냈다. 20일 은행잎이 떨어지는 서울 덕수궁에서 그를 만났다.》

하멜 지켜본 은행나무
최치원이 꾸민 ‘상림’
역사의 흔적 느끼세요



박 교수는 “전국에 수백 년 된 고목이 2만 그루 정도가 있는데 그중 숲을 포함해 천연기념물은 250여 그루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73그루에 얽힌 역사를 소개한다. “일반인은 나무가 문화재인 줄 잘 몰라요. 나무가 그저 무덤덤하게 서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역사의 편린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죠. 나무는 현재와 과거를 잇는 매개물입니다.”

그는 재밌는 사연을 담은 나무로 전남 강진군 병영면의 ‘하멜 은행나무’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하멜은 13년 동안 한국에 억류돼 있으면서 1656∼1663년 7년간 이곳에서 생활했다. 수령이 600년 정도인 은행나무 밑에는 고인돌 다섯 개가 놓여 있다. 저자는 “은행나무 밑 고인돌에 걸터앉아 머나먼 이국땅에서의 서러움을 달랬던 하멜의 심정을 떠올려 봤다”고 말했다.

강원 삼척시 근덕면의 700년 된 음나무 아래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집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공양왕은 이성계에 의해 원주로 유배됐다가 1394년 3월 삼척으로 거처를 옮겼다. 저자는 “공양왕이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귀신을 물리친다는 음나무 아래에 집을 마련했을 것”이라며 “공양왕을 교살(絞殺)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나무가 그의 목을 매단 곳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가 국내 최고의 숲 가운데 하나로 꼽은 곳은 신라 최치원이 조성했다고 전해오는 경남 함양군 상림(上林). 함양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은 읍을 가로지르는 하천 때문에 비만 오면 일대가 쑥대밭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숲을 조성했다. 국내 최고(最古)의 인공림인 상림은 현재 면적 18만 2665m², 길이 1.6km, 최대 너비 200m가량이 남아있다. 저자는 “개서어나무, 국수나무 등 1000년 전 나무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니고 현재는 그 손자, 증손자들이 숲을 호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무 과학자인 그가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75∼1977년 일본 교토(京都)대 유학시절이다. 그는 교토의 유적을 답사하며 많은 문화재가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목조문화재에 빠져들었다.

박 교수가 발표한 그동안의 연구 성과는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는 1990년대 해인사 팔만대장경 목재의 재질 분석을 통해 제작지가 기존에 알려졌던 인천 강화도가 아니라 남해안이라고 주장했다. 목재에 남부지역에서만 자라는 후박나무 거제수나무 등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충남 공주시 백제 무령왕릉의 목관이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金松)으로 제작됐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는 “문화재청과 함께 수종별 ‘얼짱’ 나무를 선정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조사는 마쳤고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위해 조사한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박 교수는 “나이가 들면서 현미경 보기가 힘들어져 이젠 나무 연구보다 나무 벗하기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노란 꽃이 예쁜 모감주나무입니다. 사진기 둘러메고 그걸 열심히 찾아다니다 보면 나이 먹는 것도 잊어버려요.”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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