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애인과 휴대전화

  • 동아일보
  • 입력 2003년 1월 10일 18시 06분


집에다 휴대전화를 놓고 나온 날이었다. 공연히 불안해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퀵서비스를 부르고 말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휴대전화를 ‘폰’이라고 간결하게 부르는 ‘폰중독’ 10대부터 그걸로는 걸고 받는 것밖에 못하는 ‘폰맹’ 40대 직장인까지 “애인은 하루이틀 안 봐도 괜찮지만 폰 없이는 잠시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폰이 애인보다 더 좋다▼
휴대전화가 애인보다 좋은 이유는 최소한 다섯 가지다.
첫째, 손안에 쏙 들어와 어디든 갖고 다닐 수 있다. 둘째, 싫어지면 쉽게 바꿀 수 있다. 업그레이드도 가능하다.
셋째, 게다가 점점 똑똑해진다. 카메라 캠코더 TV 역할까지 해서 심심할 틈을 안 준다. 아는 것도 많은 데다 지갑 대용으로도 쓸 수 있다.
넷째, 내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연락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하고, 싫으면 안 받으면 그만이다. 시끄럽게 굴면 진동모드로 바꾸거나 꺼버린다.
가장 중요한 건 다섯째다. 얼마든지 바람피울 수 있다는 점. 바로 앞에 사람을 앉혀놓고도 딴사람과 내통하는 게 가능하다.
웃자고 하는 얘기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1, 2년 새 휴대전화가 우리 삶에 가져온 문화변동은 웃어넘기기 힘들 만치 다양하고도 심오하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은 둘 다 첨단 정보 테크놀로지를 대표하면서, 서로 통합되는 디지털 컨버전스(digital convergence)를 통해 이동 정보 사회를 이끌지만 한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인터넷의 네티즌은 내가 익명으로 숨어버리는 데 반해 모바일폰으로 무장한 모티즌(motizen)에게는 내가 ‘나’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철저한 개인화 장비인 휴대전화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신형인지 구형인지만 봐도 그 주인이 새로운 걸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지 혹은 경제사정이 어떤지가 보이고, 어떤 기능을 주로 이용하는지 안다면 관심사와 가치관도 능히 파악된다. 휴대전화와 잠시 분리되면 적잖은 이들이 패닉현상에 빠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휴대전화는 단순한 기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모르는 상대와도 관심사가 같으면 사해동포주의를 나눌 수 있으나 휴대전화는 연(緣)을 더 중시한다. 개인주의를 심화시킨다기보다 친한 사람들을 더욱 친하게 만들어 기존의 네트워크와 단체행동을 굳게 해준다. 친하지 않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 내 기억번지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은 더더욱 얼굴 볼 필요 없게 단절하고 소외시킨다.
인터넷보다 쉽고 빠른 휴대전화에 익숙해진 모티즌에게는 즉각성이 참으로 중요하다. 떠오르는 생각이나 궁금증은 숙성될 틈도 없이 곧장 휴대전화로 날아간다. ‘엄지족’들에게 문자를 받고도 답신 안 보내는 ‘문자 씹는 행위’는 혐오의 대상이다. 전화를 걸었을 때 바로 연결 안 되는 상대는 ‘원격 신뢰(tele-credibility)’가 없는, 못 믿을 사람으로 찍히고 만다. 느리고 신중하고 보수적인 건 일종의 죄악이다.
모두가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세상은 전부 등돌린 채 인터넷 화면만 들여다보는 사회보다 더 삭막하다. 마주하고 있어도 그건 함께 있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접속’되기를 바라면서도 당장 당신 바로 앞에 있는 나를 한없이 외롭게 만든다. 어디선가 더 짜릿한 일이 전화벨을 타고 날아올 것 같은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지금 여기’는 무시되고 만다.
▼바람난 테크놀로지의 한계▼
그러나 의미 있고 중요한 결정이나 행동은 단답형 해법이나 지식 정보보다는 직관 믿음 두려움 같은 원초적 힘에서 비롯된다. 이런 건 가볍고 표피적인 휴대전화 관계로는 나눌 수 없다. 테크놀로지의 전자 불도저 효과 덕에 생산성이 암만 높아진대도, 이를 통한 인간관계엔 한계가 있다. 전인격적 헌신이 없는 삶은 허망하다.
애인이 진정 당신을 사랑하는지 궁금한가. 당신을 만날 때 휴대전화를 어떻게 하는지 눈여겨보라. 휴대전화에 신경 쓰지 않거나 아예 꺼놓는다면 그는 당신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아니라면? 마치 진동이 울린 듯이 휴대전화를 집어들고 외침으로써 복수하시라. “난데! 어디야?”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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