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존]'비밀' 박기형 감독 인터뷰 "후회는 없다"

  • 입력 2000년 6월 8일 10시 50분


박기형 감독은 좀처럼 속내를 꺼내지 않는다. 그가 만든 공포영화의 외피처럼 그에게는 내밀한 자기 목소리가 있어서 그것을 끄집어내려면 아주 천천히 접근해야 한다.

신작 <비밀>을 연출한 박기형은 이제 겨우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대단한 성공을 거둔 <여고괴담>에 이어 초능력의 세계를 다룬 <비밀>로 30대 초반의 한국 영화감독들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색깔을 이뤄내고 있다. 그는 한국영화에서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공포영화의 바람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초능력이 빚어낸 초현실적인 판타지를 담아낸 <비밀>을 통해 이제 공포영화 너머로 장르를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비밀>은 시장에서의 반응이 좋지 않다. 필름 2.0 이 그를 인터뷰했을 때 그는 개봉을 막 앞둔 초초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마침내 개봉한 <비밀>의 흥행 성적은 예상을 훨씬 밑돌고 있다.

데뷔작을 성공시킨 신인감독이 두 번째 영화에서 맞는 징크스를 그가 반복하는 것일까. 적당히 관습적이고 도발적이며 그만큼 대중적이었던 데뷔작 <여고괴담>에 비해 <비밀>은 개인적이고 은밀하며 호흡이 긴 판타지다. 자기 호흡으로 대중의 취향과 만날 수 있었다고 믿은 박기형의 자신감은 <비밀>의 흥행 실패를 자초했다.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여고괴담>에 이어 두 번째 영화 <비밀>도 여고생이 주인공이다. 혹시 여고생을 순수한 영혼의 대상으로 보는 판타지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 것 없다. <비밀>은 초능력 소재로 만들자는 착상을 먼저 떠올린 것이다. <여고괴담> 개봉 이후 청소년 관객들과 대화를 많이 했는데 반짝 반짝하는 질문을 던지고 에너지가 넘치는 쪽은 남학생이 아니라 여학생이었다. 저 애들의 에너지가 초능력과 맞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시작한 것이다.

-<비밀>은 공포영화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개인적인 취향으로 접수한 판타지 느낌이 강하다. 분위기는 있지만 긴장이 약하다. 충격 효과가 드문드문 배치돼 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비밀>을 만들면서 모범 삼고 싶었던 것은 이시이 소고와 데이빗 린치의 영화다. 이시이 소고의 <물 속의 8월>을 10번 이상 봤고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를 내 나름의 표현방식으로 다루려고 했다. 데이빗 린치와 이시이 소고의 영화는 대중적이지 않으니까 내가 한 번 대중적으로 조율해보자, 욕심이 있었다.

-이시이 소고의 영화는 몽환적이다. 데이빗 린치도 기이하게 일상을 담아내는 감독이고. 그들의 영화는 무엇이 현실이고 초 현실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그러나 <비밀>은 이야기의 전제가 상식적이다. 순수와 타락을 나누고 구호와 미조의 관계는 순수, 그들 주변의 세상은 타락, 이런 식으로 파고 들어간다. 나중에는 이야기의 전말을 말로 다 설명한다.

-소고와 린치 영화의 매혹을 끌어오되 그들 영화 특유의 불친절함을 접고 나만의 대중적인 표현방식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게 대중과 가깝게 소통하는 길이 아닌가라는...

-그렇지만 <비밀>의 남녀 주인공 구호와 미조는 너무 착하다. 여주인공 역의 윤미조는 신비하면서 뭔가 내면에 섬뜩한 걸 감춘 듯한 외모와는 달리 착하다는 느낌을 주니까 전혀 무섭지 않고 이야기 전개에 힘이 풀린다. 자기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미조의 초능력이 관객에게 긴장과 공포를 주는 게 미흡했다.

-무서운 영화를 만들려 한 게 아니다. <여고괴담>도 사실 무섭지 않다. 그 영화가 무서운가? 나는 <비밀>을 몽환적인 분위기로 끌고 가고 싶었다. 미조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이중적인 속성이 숨어 있는 악마 같이 만들었으면 극적으로 충격을 줬겠지. 그게 영화와 어울렸을까. 내가 바란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여고괴담>은 학교 이야기였다. 누구나 알고 있고 체험한 학교라는 그 억압적인 공간에서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끌어내 극적인 긴장을 얻었다. <비밀>의 이야기 배경은 가족이며 가족도 학교 못지 않게 억압적인 공간인데 이 영화에는 특이하게도 가족 이미지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구호도, 미조도, 구호의 친구인 현남과 그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도경의 가족도 나오지 않는다. <여고괴담>에 비해 훨씬 현실을 탈색했다.

-<비밀>의 등장인물은 모두 전형적인 캐릭터다. 그네들이 속한 가정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보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가족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가정을 포함해서 사회를 보여주는 쪽보다는... 사람이 지닌 순수한 에너지, 초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미조가 어떻게 초능력을 얻었고 그 에너지가 이롭게 쓰일 수 있었음에도 왜 훼손되는지 담으려 했다. 초능력에 집중해 사람과의 관계, 감정의 문제를 풀어낸 것이다.

-그래도 <비밀>은 중반까지 지루하다. 주로 집안에서 구호와 미조의 시선 교환을 통한 감정의 나눔만으로 초능력에의 매혹을 서술한 것은 야심이 너무 크지 않았을까.

-그게 예술적인 도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이 충분히 따라와 줄 것으로 믿었다.

-영화가 현대적인 매체라지만 사실 굉장히 보수적이고 관습적인 매체다. 공포 영화의 이야기 장치를 무시하고 시선에 기반해 감정을 끌어낸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모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물론 불안하다... 이시이 소고와 데이빗 린치 영화의 분위기를 대중적으로 해석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지만 예상보다 벽이 크다. 원래 안 되는 건가 이게, 라는 회의가 있다. 최종 믹싱작업 단계에서도 관객이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시사회를 열면서 어렵다, 지루하다, 호흡이 너무 길다, 라는 말이 들려오자 당황했다. <비밀>은 미학적인 고려를 내세운 영화가 아니라 대중적인 접근을 앞세운 영화였으니까. 개봉이 끝나면 내 의도와 관객 반응의 간극을 어떻게든 정리해야겠다.

-<비밀>에서 보여준 세계는 기이하고 낯선 세계지만 현실일 수도 있는 세계다. 일정한 충격이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 어떤 충격 말인가.

-<비밀>의 이야기 전개에서 텔레파시와 투시가 나오는 단락까지는 익숙하다. 미조의 염력이 나오는 단락부터는 뭐랄까, 저 미조의 초능력 때문에 구호를 비롯한 주위 사람이 다칠 수도 있겠구나 라고 관객이 짐작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미조는 순수한 소녀지만 그 애의 초능력이 주위를 망가뜨릴 수 있다. 미조와 구호가 조금 더 멀어졌으면 하고 관객이 바랬다면 미조에 집착하는 구호의 모습에 긴장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저 미조에 대한 구호의 매혹을 길게 끌고 간다.

-그건 너무 익숙한 이야기 체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만 빨리 정리하고 방점을 찍었다.

-그러니까 그게 바로 감독 개인의 취향으로 밀고 들어간 부분이다.

-이 초능력 이야기가 도대체 뭐지, 라고 의아해하는 관객의 궁금증을 시각적으로 잘 정리해주면 뻔한 드라마로 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기승전결의 내러티브로 꼭 풀어야 하나.

-비교는 좀 뭣하지만 비슷하게 초능력을 다룬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에는 주인공이 자기 능력에 관계없이 발휘하는 초능력 때문에 빚어지는 공포감이 강력하다. 그야말로 일상에 스멀스멀 스며들어 있는 공포 말이다.

-스멀스멀... <큐어>에는 생각보다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다. 일본 대중이 왜 그 영화를 그토록 좋아했을까. 처음 기획 단계 때 그 영화의 변형을 이 영화에 심어보자는 마음이 있었는데 분명히 오차가 있었다.

-어떤 오차일까.

-<비밀>은 미조의 초능력이 위험스럽다라는 데서 상황이 끝나버린다. 초능력이 위험한 해를 끼치는 부분이 영화의 마무리에 나온다. 미조가 자기 의지대로 염력을 조종할 수 없고 흐트러지는 데서 재미를 만들어낼 여지가 훨씬 많았는데 바로 그것이 '비밀'이었다고 말하고 끝내니까.(웃음)

-그러니까 <비밀>이 대중영화가 아닌 감독 개인의 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예술영화라는 거다. (웃음)

-아닌데, 작가의 야심 포기한지 오래 됐는데. (웃음)

-<비밀>은 <여고괴담>을 만든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이고 초능력을 다룬 영화이고, 그러니 관객은 자연스럽게 공포 영화 쪽으로 기대지평을 맞춘다. <비밀>이 관객의 그런 기대를 배반했다고 생각하지 않나.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지만 <사이코>는 45분이 지나야 충격적인 샤워 살해 장면이 나오고, <엑소시스트>는 무려 1시간을 아무 극적인 사건도 없이 버텼다. <비밀>은 무려 2/3까지...(웃음)

-그런 분위기를 관객과 함께 하는 것이 재미라고 생각했는데 요 며칠 동안 그게 나만의 재미가 아니었나, 반성하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 더 조종돼야 했던 건지, 어디서 착오가 생긴 건지 검토 중이다.

-대체로 일본영화는 정교한 반면에 야심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개인적이고 미시화 된 것 같은 그런 경향이 있다. <비밀>이 <여고괴담>에 비해 공격적인 힘이 떨어진다고 느껴지는 것도 참조한 일본영화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비밀>은 가족을 얘기하지만 조금 더 사적이고 개인적으로 풀어간다.

-(나즈막히 말하던 박기형 감독의 목소리 톤이 처음으로 조금 높게 올라갔다) 미조가 어떻게 초능력을 지니게 됐는지 거기에 주목해 보라. 미조는 부모를 죽인, 존속살해를 저지른 아이다. 그런 아이가 순수한 시선에 맞닿으면 초능력을 발휘한다. 그걸 주목하면 이 영화에 도전적인 부분이 있다는 걸 알 것이다. 다만 심의를 의식한 자기 검열 과정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던 간에 과연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설정을 해도 되는 건지 고민했다. 결국 심의를 의식해 너무 숨겨놓다 보니 미조가 애초에 초능력을 지니게 된 맥락을 관객이 지나치는 문제가 생겨났다. 내 실수다.

-그렇다. 조금 더 세게 갔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결국 간접적으로 택한 방법이 어지러운 느낌, 이미지를 혼란스럽게 중첩시키는 형태였다. 존속살해에 얽힌 초능력의 비밀을 명확하게 끌어냈으면 관객과 더 잘 소통했을지도 모른다.

-첫 영화 <여고괴담>은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했지만 <비밀>은 불안하다. 두 번째 영화를 막 만든 감독으로서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고민이 있을 것이다.

-딱히 노선을 정한 것은 아니다. 내가 재미있는 것을 할뿐이다. <여고괴담>도 내가 재미있어서 한 영화였다. <비밀>도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 도전할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택한 영화다. 후회는 없다. 다만 대중 관객의 호흡을 계산한 부분에서 오차가 있었다. 앞으로 그 오차를 찾아내야 한다. 나는 오래 평생 영화를 할 것이다.

<김영진 편집위원>

기사 제공: FILM2.0 www.film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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