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이맛!]냉면

  • 입력 2009년 6월 5일 03시 00분


슴슴한 ‘평양’ 얼얼한 ‘함흥’

‘입맛 피서’ 어디로 떠날까

덥다. 냉면집이 북적인다. 고깃집에서 갈비를 뜯고도 꼭 냉면으로 입가심을 한다. 이른바 ‘고깃집 냉면’이다. 육수가 들척지근하고 조미료 맛이 난다. 다방커피 같다. 면이 가늘고 질기다. 한번 입에 물면 면발이 끝날 때까지 후루룩거려 목구멍으로 넘겨야 한다. 아니면 앞니로 잠시 문 채, 안쪽 어금니로 뒤쪽 면발을 슬근슬근 갈아 넘기는 수밖에 없다. 앞니 사이에 꽉 끼어 나부대는 면발도 있다.

냉면은 크게 보면 국수의 일종이다. 사촌쯤이나 될까? 국수는 밀가루를 주로 쓰지만(막국수는 예외), 냉면은 메밀가루에 감자나 고구마전분을 쓴다. 육수도 다르다. 국수는 거의 멸치육수에 다시마나 바지락 등 해물을 넣는다. 물론 칼국수엔 닭국물이나 사골국물을 쓰기도 한다.

냉면은 양지머리 등을 삶아 우려낸 육수가 대부분이다. 조선시대엔 자줏빛 오미자국물을 쓰기도 했다. 요즘은 ‘진주냉면(055-741-0525)’집의 해물육수(멸치 새우 홍합 바지락 황태에다 채소와 과일을 섞음) 정도가 예외다. 진주냉면 집은 한때 대학 조리학과 교수가 육수비법을 훔치려다 적발돼 화제가 됐던 곳. 냉면 고명으로 쇠고기전(육전)을 얹는 것도 독특하다. 육수도 남쪽답게 간간하다. 북쪽 김치가 시원 담백하고, 남쪽 김치가 걸쭉 짭짤한 이치와 같다.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 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c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1912∼1995) ‘국수’ 부분>

냉면은 원래 북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냉면집 이름에 ‘평양’이나 ‘함흥’이 붙지 않으면 뭔가 빠진 것 같다. 칼바람 쌩쌩 몰아치는 한겨울, 쩔쩔 끓는 아르c(아랫목)에서 새참이나 야식으로 먹었다. 한겨울 아이스크림 먹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입안이 얼얼한 댕추가루(고춧가루)와 탄수(식초)를 치고 산꿩 고기를 고명으로 얹는다. 육수는 들큼하고 슴슴하며, 텁텁하다.

서울 장안엔 ‘평양냉면 4대천왕’이 있다. 고깃집 냉면이 다방커피라면, 이곳은 별다방 콩다방의 에스프레소인 셈이다. 언제 가더라도 중절모 차림의 할아버지들로 북적인다. 을지로4가의 우래옥(02-2265-0151), 을지로3가의 을지면옥(02-2266-7052), 충무로의 필동면옥(02-2266-2611), 장충동의 평양면옥(02-2267-7784)이 그곳이다. 거의 한동네에 끼리끼리 모여 있다.

모두 육수가 밍밍하고 담백한 편이다. 면발도 메밀 함량이 많아 툭툭 끊어진다. 면발이 구수하고 투박하다. 메밀 냄새와 면발의 꺼끌꺼끌한 맛이 좋다. 하지만 집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래옥과 평양면옥은 육수 맛이 약간 강하고, 필동면옥은 냉면에 고춧가루를 듬뿍 쳐서 나온다. 제육이 일품이지만, 요즘은 옛날만 못하다는 불평도 있다. 을지면옥은 메밀 삶은 면수(麵水)가 좋다. 조선간장과 고춧가루를 조금 쳐서 쭉 들이켜면, 술꾼 해장국으로는 그만이다. 우래옥은 배 채 친 것, 백김치 등 고명이 맛있다.

서울 중구 다동의 남포면옥(02-777-2269)이나 마포구 염리동의 을밀대(02-717-1922)도 이름난 집이다. 남포면옥은 시원한 동치미에, 면발이 쫄깃하진 않지만 부드럽고 메밀 맛이 많이 난다. 봉평 메밀만 쓰며 메밀 90%에 감자전분 10%를 고집한다. 쫄깃한 수육이 빼어나다.

을밀대는 육수 맛이 약간 자극적이어서, 젊은층 취향이라는 평이다. 확실히 어르신들이 4대천왕 집보다 적다. 직장인과 여성들이 많은 편이다. 노릇노릇 바싹 익은 녹두빈대떡이 맛있다. 면발이 다른 곳보다 두툼하면서도 쫄깃하다.

함흥냉면은 감자나 고구마 전분을 쓴다. 면발이 쫄깃하고 질겨 잘 끊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매운 양념(다대기)과 회를 얹어 비벼 먹는다. 참기름 설탕 식초 겨자도 살짝 곁들인다. 문득 어릴 적 킥킥대며 흥얼거리던 노래가 떠오른다. 아마도 이 노래에 나오는 촌사람은 함흥냉면을 먹었을 것이다. 면발이 얼마나 쇠심줄처럼 질겼으면 콧구멍으로 빼내고 빼내도 끊어지지 않았을까. 매운 면발이 다 빠지고 난 뒤, 콧구멍은 얼마나 맵고 시렸을까. 한참 동안 마당에서 ‘냉면 먹고 맴맴’ 한 스무 바퀴는 돌았으리라.

‘한 촌사람 하루는 성내 와서 구경을 하는데/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면서/별별 것 보았네/맛 좋은 냉면이 여기 있소/값싸고 달콤한 냉면이오/냉면 국물 더 주시오, 아이구나 맛 좋다//한 오라기 콧구멍에서 나오는 걸/손으로 빼냈네/줄줄줄 빼낸다 또 빼낸다/아직도 빼낸다/맛 좋은 냉면이 여기 있소/값싸고 달콤한 냉면이오/냉면 국물 더 주시오, 아이구나 맛 좋다’

함흥냉면은 서울 오장동의 흥남집(02-2266-0735), 신창면옥(02-2273-4889)이 이름났다. 수입 홍어나 가오리 대신 서해 간재미를 쓰는 명동함흥면옥(02-776-8430)도 발길이 붐빈다.

냉면은 역시 육수 맛이다. 겨자와 식초는 육수 맛을 본 뒤에 쳐도 늦지 않다. 평양냉면의 밍밍하지만 돌아서면 그리운 맛, 진주냉면의 간간하지만 새록새록 솟는 바다냄새. 육수 맛을 본 뒤엔 면발의 질감을 느껴봐야 한다. 처음엔 혀와 입으로, 그 다음엔 가슴으로, 마지막엔 온 몸으로 떨어봐야 한다. 메밀 냄새는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요즘 냉면집에선, 면발을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먹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후미진 골목 담장에 그려진 가위가 떠오른다. 무섭다. 길가 전봇대에도 시퍼런 가위 그림이 영덕대게처럼 눈 부릅뜨고 있다.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데 술꾼들은 오싹하다. 맛이 싹 달아난다. 가위는 냉면의 천적이다. 가윗날이 닿은 면발에선 역한 쇠 냄새가 난다. 모든 면발은 쇠붙이가 닿는 순간 ‘철사’가 된다. 제발 냉면집에서 쇠붙이는 가라!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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