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사랑의 詩]오규원/‘비가 와도 젖은 者는’

  • 입력 2008년 5월 8일 03시 00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다. 시간의 일회성과 불가역성(不可逆性),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명료하게 요약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다가왔다가 사라져가는 ‘시간’이, 이 시편에서는 멈출 수 없는 ‘비’와 젖지 않는 ‘강’으로 은유된다.

비를 멈출 수 없어 추녀 밑에 멈춘 그대와 나는 다시 거기 머물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를 젖게 하고 그대 안으로는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강렬한 사랑 안에 멈추고 머물고 젖으려 하지만 속절없이 흐르고 떠나가는 시간 속에 잠시 멈추었다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이처럼 ‘멈춤(머묾)’과 ‘흐름(떠남)’, ‘젖음’과 ‘젖지 않음’은 이 시편에서 ‘욕망’과 ‘현실’의 관계로 표상된다. 그래서 우리는 잔혹한 ‘시간’의 흐름 속에 멈출 수도, 머물 수도, 젖을 수도 없다. 이미 사랑으로 젖은 사람은 불멸의 기억 속으로 떠나갈 뿐이다.

일찍이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고 ‘우리도 늘 흔들리고 있음’(‘만물은 흔들리면서’)을 고백했던 시인은, 한번 머물다 간 사랑이 결코 동일한 질감과 무게로 재현될 수 없음을 이렇게 노래한다. 이 시편이 실린 ‘순례(巡禮)’(1973)는, 그렇게 슬프게 흔들리며 흘러가 버린 시간에 대해 노래한 아름다운 시집이다. 이제 빗물도 강물도 여름도 고기들도 그리고 시인도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먼 순례의 길을 떠났다. 비가 와도 다시 젖지 않는 가벼운 몸이 되어.

유성호 평론가·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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