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사랑의 詩]서정주 ‘대낮’

  • 입력 2008년 4월 24일 02시 58분


일러스트레이션=김수진 기자
일러스트레이션=김수진 기자
여기 들끓는 청춘의 몸이 있다. 하나의 몸이 다른 하나의 몸을 부른다. 달아나면서 부르는 몸은 강렬한 매혹의 이미지이다. 아편의 종류인 ‘핫슈’처럼 치명적인 도취와 환각의 상태로 유인한다. 청춘의 관능은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것이다.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의 길’에서 그 사태가 지금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환각과 도취의 ‘등어릿길’에서 임을 따라가는 나는 코피가 흐른다. 내가 견디지 못하는 어떤 파괴적인 에너지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코피는 내 몸과 영혼이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일종의 비명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임을 쫓을 수밖에 없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려는 몸, 그것이 사랑에 사로잡힌 몸의 행동양식이다. 그래서 관능의 끝에는 죽음의 공포가 강한 향기처럼 흘러나온다.

사랑하는 임을 일종의 악마적인 유혹의 기표로 설정하는 것은 하나의 이념적인 환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의 가장 강력한 매력은 그 사랑이 ‘대낮’이라는 시간 속에서, 더욱이 야생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구성됐다는 점이다. 대낮은 일상과 생산성과 합리성의 공간이다. 그 대낮에 벌어지는 에로스적인 혼돈과 착란은 낮의 제도화된 질서를 근원적으로 뒤흔든다.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이라는 절묘한 표현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것은 밤과 낮의 구획을 교란시키고, 대낮을 원초적인 제3의 시간대로 일거에 몰아간다. 사랑은 대낮을 들끓는 밤의 시간으로 이동시키는 불온한 사건이다. 청춘, 그 질주하는 야생의 관능을 보여준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은, 그의 후기시의 정밀함보다 더욱 매혹적이다.

이광호 문학평론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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