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로 논술잡기]고전과 씨름하다 보면 정신이 한뼘 쑥

  • 입력 2004년 11월 5일 16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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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214쪽 6500원 문예출판사

대입 논술 평가의 핵심은 ‘쓰기’보다는 ‘읽기’에 있다. 길고 어려운 제시문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제대로 답안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의 학업은 정확한 독해능력과 지적(知的) 지구력을 필요로 한다. 대입 논술에서 읽기 평가에 중점을 두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최근 논술고사에서 고전(古典) 관련 제시문이 늘어나는 추세다. 고전은 오랜 세월 검증된 인류의 필수 소양을 담은 책이다. 교양의 폭과 생각의 깊이를 가늠하는 데는 고전 지문이 가장 적합한 소재라 할 만하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에게 고전은 넘기 어려운 산이다. 아이들에게 권해 줄 고전을 정할 때는 다음 기준이 도움이 된다. 부담스럽지 않은 짧은 분량, 추상적이지 않으며 일상과 연관된 내용, 쉽고 간명한 문체.

오늘 소개할 ‘사랑의 기술’은 이 세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주는 책이다. 프롬은 ‘사랑’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수필 같은 문체로 풀어낸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매력적인 상대를 만나 감정이 타오르게 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멋진 대상을 만나기만 하면 저절로 좋은 그림이 그려진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단히 그림 실력을 연마해야 하듯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나아가 사랑은 자기수양을 통해 온전하게 홀로 설 수 있을 때만 비로소 온전해 질 수 있다. 내 욕구를 채워줄 수단으로 사랑의 상대를 찾고 있다면 사랑은 마약과 같은 고통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오직 그 사람만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이는 둘만의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이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게 진실한 사랑이다. 제대로 사랑한다면 자아가 온전해져서 남에 대한 배려심이 더 넓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랑까지도 교환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사람들은 자신을 멋진 ‘상품’으로 보이게 하는 데만 관심을 가질 뿐 상대와 진정한 합일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점점 무관심해지고 있다. 이처럼 사랑의 의미를 되짚다 보면 어느덧 독자들은 현대 사회의 병폐를 진단하고 고민하게 된다.

‘사랑의 기술’은 비교적 쉬운 고전이지만 학생들에게는 결코 만만한 책이 아니다. 끙끙대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쉬운 요약본을 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설픈 온정주의는 교육을 망친다. 고전과 씨름해 본 경험은 아이들의 정신을 한 뼘 키워 준다는 점을 명심하자.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학교 도서관 총괄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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