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박세현, “너무 많이 속고 살았어”

  • 입력 2007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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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

30년 만에 소집된 얼굴들을 만나니 그 낯짝 속에

근대사의 주름이 옹기종기 박혀 있다

좀이 먹은 제 몫의 세월 한 접시씩 받아놓고

다들 무거운 침묵에 접어들었다

화물차 기사, 보험 설계사, 동사무소 직원, 카센

터 주인, 죽은 놈

만만찮은 인생 실력들이지만 자본의 변두리에서

잡역부 노릇 하다 한 생을 철거하기에

지장이 없는 배역 하나씩 떠맡고 있다

찻집은 문을 닫았고 바다도 묵언에 든 시간

뒷걸음치듯이 몇몇은 강문에서 경포대까지

반생을 몇 걸음으로 요약하면서 걸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었던 간밤의

풍경들이 또한 피안처럼 멀어라

-시집 ‘사경을 헤매다’(열림원) 중에서.》

지난 세월 돌아보면 명치가 아려오지 않는 이 얼마나 있을 터인가.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는 꿈을 좇아 얼마나 종종걸음 쳤던가. 그러나 좋은 배역은 아닐지라도 너무 상심할 것은 없다. 세상은 가장 하찮은 배역 하나만 빠져도 온전치 않을 것이니, 이름 없는 작은 풀꽃 하나만 사라져도 들판은 얼마나 성글 것인가. 돌아보면 회한 없는 생이 있으랴만 겨우내 꽃나무는 꽃이 져도 꽃나무이며, 과일나무는 과일을 떨어뜨려도 과일나무이다. 너무 많이 속고 살았다는 말은 아직도 꿈꾸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돌아보면 제 몫의 좀이 한 접시이지만, 시인의 다른 시편 제목처럼 그래도 ‘삶은 두근거림의 총화’이지 않은가.

-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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