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리포트]뉴욕 크리스티 ´인상파와 현대미술 경매´

  • 입력 2002년 11월 14일 17시 43분


분주한 크리스티의 직원들. /뉴욕=홍권희특파원
분주한 크리스티의 직원들. /뉴욕=홍권희특파원
‘이건 얼마쯤 나갈까.’ 미술관에서 흔히 갖게되는 궁금증이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의 ‘인상파와 현대미술 경매’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6일 오후 6시반, 맨해튼 한복판의 뉴욕 크리스티(록펠러 플라자 20번지). 1층 로비는 발디딜 틈이 없다. 아시아인도 간간이 눈에 띈다. 1∼5일 경매작품 전시장의 한가함은 찾아볼 수 없다.

크리스티의 홍보담당 마거릿 도일은 기자에게 출입증과 경매대상 54점에 관한 기본자료, 도록(圖錄)을 건네주었다. 162쪽에 이르는 40달러짜리 도록엔 작품해설과 전시이력이 자세히 소개돼있다.

경매는 가장 넓은 2층 제임스 크리스티룸에서 진행됐다. 미리 신청하면 누구나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입장권이 없으면 맨 뒤에 서서 구경해야 한다. 경매장 오른쪽 뒷줄에 있는 20석의 기자석도 평소와 달리 꽉 찼다. 인상파 미술의 이름값이다.

‘땅땅땅, 땅, 땅, 땅.’

오후 7시 경매진행자인 크리스토퍼 버지가 왼손에 든 해머로 경매진행대(臺)를 가볍게 내리쳤다. 경매시작 소리에 플로어의 1000여명이 긴장한다.

“번호 1,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 뒷모습’입니다. 예상금액은 최저 40만달러, 최고 60만달러.”

모네 ‘수련’

●큰손들 대부분 전화로 주문

버지씨 뒤편 전광판엔 달러표시 외에 다섯가지 화폐로 환산된 금액이 안내된다. 파운드, 유로, 홍콩달러, 엔, 그리고 스위스프랑이다. 경매대 왼편에 설치된 회전진열대에 그림 실물이 조명을 받으며 나타난다. 그 왼편의 대형 스크린엔 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플로어에서 나오는 주문과 전화 및 인터넷주문이 한꺼번에 처리된다. 버지씨가 빠르게 숫자를 읊어댄다. “25만달러, 26만달러, 27만달러….” 이걸 ‘25, 26, 27’로 줄여 읽을 수도 있겠지만 버지씨는 ‘달러’ 단위 한번 빠뜨리지 않는다.

“더 없습니까. 마지막 기회입니다.…네, 그럼 38만달러에 낙찰됐습니다.”

버지씨가 해머를 한 번 ‘땅’하고 내리쳤다. 2분 만에 그림 주인이 바뀌었다. 주문자들은 대부분 숨어있다. 플로어에 나온 사람들은 구경꾼이다. ‘큰손’은 대리인을 현장에 보내기도 하지만 전화를 걸어 주문을 내는 게 보통이다. 경매장 앞과 오른쪽 테이블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크리스티 직원 30여명이 고객의 요구에 따라 경매에 참여한다.

피카소 ‘원숭이’

낙찰가격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번호 18까지는 하나만 빼놓고 모두 팔렸다. 버지씨가 “번호 19”를 외치자 플로어엔 작은 소리마저 사라졌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睡蓮)’ 차례였다. 경매장 한쪽 벽에 특별히 전시된 이 그림의 예상가격은 1000만∼1500만달러. 한화로 120억∼180억원이다. 1990년 반 고흐의 ‘의사 고세의 초상’이 기록한 사상 최고가격 7500만달러(약 900억원)의 20%도 안되지만 요즘 미술시장에선 최고수준이다. 가로 2m, 세로 1.3m의 유화 한점 값이 이처럼 높은 것은 인상파의 대표작품의 하나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주문가격은 800만달러까지 수월하게 올라갔다. 1979년 경매가격 71만5000달러의 10배를 넘어섰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버지씨가 전화주문을 전달하는 크리스티 직원들과 플로어의 관객들을 연신 훑어본다. “더 없습니까.” 크리스티측의 기대와는 달리 경매장은 달아오르지 않았다. 최고 호가는 850만달러. 버지씨는 유난히 길게 뜸을 들인 뒤 “내정가격을 밑돌아 유찰됐다”며 해머를 ‘땅’하고 내리쳤다.

“아아.” 플로어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크리스티가 이번 경매에서 현대미술의 ‘대표선수’로 꼽아놓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검은 옷’은 평가가격이 900만∼1200만달러였다. 사자 주문은 최고 750만달러로 내정가격에 미달해 역시 유찰됐다. 플로어에서는 또한번 ‘아아’ 소리가 나왔다.

●인상파 작품들 최저가이하 팔려

두 ‘대표선수’는 팔리지 않았다. 거래가 이뤄진 인상파의 많은 작품들도 예상최저가격 이하로 팔렸다. 경기가 나쁜 탓일까. 전문가들은 “그렇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예상금액보다 훨씬 비싸게 팔리는 작품들도 여전히 많다”고 말한다. 이들은 “유행이 바뀌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오귀스트 로댕의 ‘입맞춤’은 예상가격 40만∼60만달러인 흰 대리석 조각이다. 주거니 받거니 주문들이 쌓이며 가격이 껑충껑충 뛴다. 50만달러를 넘어서자 전화를 받는 직원들의 긴장감도 더해간다. 어느새 75만달러. 플로어에 앉아있는 관객들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다. 한번에 몇 만달러씩 값을 올려부르는 사람들이 누군가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다. ‘땅’하고 버지씨의 해머가 소리를 냈다. 전광판의 가격은 80만달러를 가리키고 있다.

경매시장에서 조각작품의 높은 인기는 훌리오 곤살레스의 철 용접 조각 ‘고딕 인간’ 거래에서도 확인됐다. 크리스티측이 공격적으로 붙여놓은 예상가격은 150만∼200만달러. 그러나 55.5㎝짜리 이 작품을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이 치고받는 사이에 값이 310만달러까지 치솟았다. ‘철조(鐵彫)의 개척자’ 곤살레스의 작품 가운데 가장 비싼 이 조각품을 차지한 사람은 ‘유럽의 개인’이라고 크리스티측은 밝혔다.

●곤살레스 조각 310만달러 껑충

파블로 피카소의 청동조각 ‘원숭이’도 주목을 끌었다. 새끼를 안고 있는 원숭이 모양의 높이 54㎝짜리 이 조각은 피카소의 조각으로는 최고가인 610만달러에 팔렸다. 크리스티에 내는 수수료까지 합하면 671만9500달러(약 80억6400만원). 이날 경매작품 중 가장 비싼 값이다.

“솔직히 말해서 인상파 작품이 고평가돼 있습니다.”

버지씨는 경매 후 기자 브리핑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10여년전 일본의 투자자들이 지나치게 값을 올려놓았다’는 비판의 대상이 된 인상파 미술의 ‘거품’을 시인한 셈이다. 버지씨는 미국 크리스티의 명예회장이기도 하다.

‘사자 주문이 약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버지씨는 “19, 20세기 미술품 가운데 50만∼60만달러, 500만∼600만달러 가격대의 작품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강하다는 게 확인됐다”고 대답했다. “질 높은 작품에 가격이 제대로 매겨지면 잘 팔 수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명화 거래 장면은 뉴요커들에겐 저녁나절 구경거리다. 인상파 그림의 인기가 식고 조각작품 값이 치솟는 현장을 지켜본 관객들은 툭툭 자리를 털고 맨해튼 거리로 사라졌다.

뉴욕=홍권희 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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