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맨]생각은 컴퓨터처럼 일은 게임처럼

  • 입력 1999년 9월 6일 18시 34분


《“아날로그 시대는 끝났다.” ‘디지털 세대’가 ‘선전포고’를 하고 나섰다. 정보화 혁명의 선도자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사장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컴퓨터를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로 구분. ‘미즈&미스터’팀은 컴퓨터와 함께 놀며 컴퓨터와 함께 성장해 컴퓨터를 매개로 살고 있는 ‘디지털맨’으로 규정한다. 이들의 삶은 컴퓨터와 상관없이 나이 먹어온 아날로그 세대의 그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성큼 다가온 ‘디지털맨’의 세계에 접속한다.〈편집자 주〉》

인터넷통신판매업체 N산업. 사직서를 쓰는 박영수과장(36·가명)의 손 끝이 가늘게 떨렸다. ‘끙’.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뱉으며 밤새 꿈에서 그를 괴롭힌 이름을 뇌까렸다. “김대리, 건방진 자식….”

이 회사 입사 5년차 김현호대리(30·마케팅팀)는 박과장이 명예퇴직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동요하지 않았다. ‘아날로그 세상’에 안주해 있던 박과장은 이 뒤바뀐 ‘디지털 세상’에서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다.

◆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 ◆

80년대 초반 대학에 컴퓨터교육이 도입되면서 컴퓨터와 안면을 튼 일부 30대와, 컴퓨터와 함께 놀며 자란 20대는 ‘인풋→프로세스→아웃풋’의 명확한 컴퓨터식 논리가 몸에 밴 ‘디지털 세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눈에 보이는 것(아웃풋)’만으로 사고(思考)하는 ‘아날로그 세대’와는 전혀 다른 ‘두뇌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손정의 사장은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의 특징을 ‘하나는 제로, 또 하나는 무한대’라는 숫자로 설명했다. 0과 1로 나뉘는 비트의 세계에서 1등이 아니면 패배자나 다름없다. 승자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모든 것을 갖는다. 그러니 상사가 아니라 사장이라도 실력이 나보다 못하다면 복종할 이유가 없다.

직원들이 일한 결과가 과장→부장→이사의 ‘선’을 따라 움직이던 지금까지의 ‘아날로그식’ 관행 속에서 중간 간부는 윗사람과 부하직원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충실히 하면 됐다.

그러나 인풋을 할 때부터 프로세스 전체를 조망하며 일을 처리하는 디지털세대에게 ‘아랫사람은 주어진 일만 할 것, 나머지는 관리자들이 알아서’식의 주문은 고문이었다.

◆ 반갑다 전자결재 ◆

그런 디지털맨들에게 e메일은 ‘해방구’로 다가왔다. 2년 전 e메일을 이용한 전자결재가 시작되자 N산업 내부에서는 ‘반란군’들이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김대리로부터 ‘수신인:이사, 참조인:부장, 과장’의 e메일 결재양식이 날아들자 이모 이사(52)는 반색했다. 거르지 않은 정보를 볼 수 있다니, ‘가위질 안 한 에로물’을 보는 기분이었다. 실적을 놓고 매년 고용계약을 맺는 그에게는 장사에 도움만 된다면 나이야 많건 적건 능력 뛰어난 부하가 최고였다.

사직서를 쓰기 한 달 전, 박과장은 쇼핑몰 세일행사에서 한 품목의 세일가격이 잘못 적힌 것을 발견하고 김대리를 회의실로 불렀다. 15분간 꾸지람을 들은 김대리는 제 자리로 돌아와 단 1분만에 지적사항을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박과장에게 e메일을 ‘날렸다’.

“오류를 수정했습니다. 하지만 15분 동안 연설을 하는 대신, 1분만 내서 직접 수정을 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e메일은 이사를 비롯한 100여명의 전직원에게 배달됐다. 박과장은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사표를….

◆ 디지털 오피스에서 일은 곧 게임 ◆

최근 사무실의 책상배치를 새롭게 한 통신업체 S사. 팀장―과장―사원의 순으로 책상을 줄지어 놓고 앉던 ‘아날로그식 관행’을 깨고 팀장의 자리만 따로 마련했다. 나머지 사원 대리 과장들은 각자 ‘원하는 자리를 골라’ 섞여 앉는 ‘디지털 오피스’로 바꾸면서 과장은 중간관리자가 아닌 실무자로 변신. 그러나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게 과장들의 반응. “디지털맨은 같이 일 할 상대이지 거느릴 부하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회사 임연우대리(31)에게 일은 곧 게임. 일주일에 사흘은 집에 들어가지 않으며 퇴근도 보통 새벽 3, 4시. 최근 70일간은 휴일 없이 근무. 새벽 1시경이면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인터넷 뉴스그룹에서 음란물을 감상하거나 스타크래프트를 한다. 한 잠 자거나 사우나로 피곤을 푸는 아날로그 세대와 딴 판이다. 한 금융기관과 새로운 ‘사이버머니’ 개발, 전시회 준비, 홍보전략 수립 등 11가지의 일을 동시에 진행중인 그는 “매 순간 도전과 맞서는 스릴을 잠시도 놓치고 싶지 않다”며 객실에 인터넷 전용선이 없는 호텔로는 휴가도 안 간다.

◆ 원치 않는 일은 안한다 ◆

거래처 사람을 만날때 종종 자신을 ‘지사장’이라고 소개하는 임대리. “임직원 100명중 서열은 밑에서 6번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오너’라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 연봉에 3000만원을 얹어 줄테니 부장으로 오라”는 스카웃제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내가 원치 않는 일은 수 억원을 줘도 안 한다”는 것은 신념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사고방식.

임대리에게도 e메일은 ‘위 아래 구분 없이 직설적으로 대화 할 수 있는 곳’. 그는 “민주주의는 네트워크상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위아래를 따지느라 정작 일 얘기는 당당하게 하지 못했던,네트워크 이전 세상을 거부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디지털시대의 마케팅전략’을 연구중인 삼성경제연구소 조영빈 수석연구원에 따르면 디지털맨은 ‘소수들의 큰 집합’. 뭐든 한 가지만 잘 하면 공부를 못해도 상관 없다는 새로운 교육을 받으며 자란 덕분에 각자 취향이 다양하다. 자기가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반 미치광이’. 개성이 너무도 강해 ‘강남지역 30대 전문직은 이러저러하다’는 식의 소비성향을 파악할 수 없다. 겉으로는 공통점을 찾기 힘들지만 일터에서, 사이버공간에서 ‘광기’를 해소하는 것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

◆ 다음주엔…◆

◇'광기와 모순' 편입니다

최근 ‘ANY4U’라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를 세워 독립한 강호수씨(28). ㈜솔빛 근무 시절,정기 건강검진결과가 나오자 담당의사는 그를병원으로불렀다. “폭탄주를많이드시나보네요.”

어리둥절해진 강씨.‘맥주 한 잔도 제대로 마셔 본 적이 없는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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