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 (21)]면암 최익현

  • 입력 1998년 3월 5일 19시 57분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1833∼1906)이 살다간 시대는 동아시아를 ‘천하’로 인식하던 조선인들에게 의식의 지각변동을 요구하던 격변기였다. 서양이 포함된 새로운 세계질서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선왕조는 19세기 외척 세도정치로 이행되면서 쇠퇴기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내부적 위기상황에 밀어닥친 이질적인 서구문명의 강압 속에서 조선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려던 지식인들은 심각한 지적 고민에 직면하였다.

최익현은 그러한 혼란기에 누구보다도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 그 신념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갖은 시련을 겪은 조선 선비였다.

유교문화권의 동양은 농경사회를 기초로 평화공존하는 국제질서, 즉 중화(中華)문화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던데 반해 서양의 제국주의는 무력을 앞세운 약육강식의 논리로 세계를 제패하였다. 이에 대응하는 지식인 사회의 노선은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으로 나뉘게 되었다.

개화사상은 18세기 북학사상에 뿌리를 두고 지배층의 자기 변화논리로 기능하면서 새로운 문명의 수입 통로를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에 편입하려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서양에 편입한 일본을 배우자는 방법론이었다. 또한 그러한 현실론적 성격에 의해 친일파로 변신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반면 위정척사사상은 재야학인(在野學人)인 유림(儒林)이 중심이 되어 자기 문화 보존논리로 제몫을 다하였다. 이들 유림은 조선왕조가 5백년동안 문치주의를 지향한 결과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던 성리학자들로, 일반지식인 군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왕조에 실현된 성리학적인 사회체제를 수호하려 했다. 서양 물질문명의 한계를 직시했을 뿐만아니라 평화공존과 도덕적 문화국가를 지향해오던 조선문화의 정체성이 점점 상실되어가는 것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또한 생필품을 자급자족하던 조선의 경제체제를 조악한 공산품으로 공략하려는 자본주의 속성을 예리하게 간파하였다. 그들의 상소문에 나타난 양이(洋夷·서양 오랑캐)에 대한 개념은 무력 힘의 논리로 침략하고 약탈하던 왜구를 북방족 오랑캐로 인식하던 조선사회의 기본적인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최익현은 경기 포천 출신으로 14세에 경기 양평에 은거하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의 제자가 되었다. 이항로는 조선말기 위정척사사상을 고수하던재야학자로 중부지방 유림의 대표적 인물이다. 최익현은 그의 문하에서 기호학파의 학맥에 편입되고 10여년간 성리학을 학습, 1855년 23세때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부정자(副正字·외교 등의 문서를 작성하던 벼슬)로 출사한 후, 언관직(言官職·언론 담당, 감찰 비판 및 문서작성 등을 하던 벼슬)을 주로 역임하였다.

1868년대원군의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파탄을 논한 것도 사헌부 장령(掌令·감찰 등을 담당하던 벼슬)으로 언관직을 수행한 것이다. 이는 대원군 집정기에 막혔던 언로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이 세도정치로 인해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최익현은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는 조선 사대부의 기본적인 의식을 대변한 것이다.

1873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비판한 ‘계유상소(癸酉上疏)’는 유학자로서 유림의 기반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려는 대원군의 의지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 상소로 인하여 대원군의 10년 세도가 무너졌다는 것은 최익현이 일반 지식인인 유림의 위기의식을 대변한 것이며 그들의 반발이 그만큼 치열하였다는 입증이다. 물론 고종의 친정(親政)이라는 명분도 작용하였다.

1876년 최익현은 일본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결사 반대하는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를 올렸다. 그는 여기서 일본은 서양 오랑캐에 편승하는 나라로, 청나라보다 더욱 위험한 존재라 규정하였다. 그 상소문의 격렬함과 그것이 초래한 민심의 동요로 인하여 흑산도로 유배당하였다. 이후 20여년간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는 1895년 국모인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을 일으켰다.

대한제국 출범후 고종으로부터 여러번 관직을 제수받았지만 사퇴하고 계속 상소를 올려 국정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발표되자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재소(再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알릴 것과 조약체결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五賊)의 처단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74세의 고령으로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 체포되어 쓰시마(對馬)섬에 유폐되었고 그곳 감옥에서 단식으로 저항하다 끝내 순국하였다. 이같은 그의 항일의병운동은 일제하 독립운동의 원천이 되었다.

최익현은 국가적 위기를 당하여 선비의 마지막 선택인 무력항쟁으로 애국을 실천하였다. 그는 타협과 굴절을 외면하고 망국의 고통을 구국항쟁으로 승화시킨 조선 선비의 전형이었다.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저항과 투쟁으로 점철된 그의 치열한 생애는 현실론이 판을 치는 오늘에 시사하는 바 크다.

지금 충남 예산엔 그를 기리기 위한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있다. 또한 충남 청양의 모덕사(慕德祠)를 비롯하여 경기 포천, 전북 고창, 전남 구례 등 곳곳에서 제향(祭享)을 올리며 그의 높은 지조와 절의를 기리고 있다.

정옥자<서울대교수·한국사>

◇약력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 △저서‘조선후기 문화운동사’‘조선후기 지성사’‘조선후기 역사의 이해’‘역사 에세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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