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6월 둘째주

  • 입력 2004년 6월 6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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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땔감용 나무 채취로 황폐화된 산림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구공탄 보급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1952년 관계당국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구공탄 사용 설명회.-‘서울20세기 100년의 사진기록’ 자료사진
정부는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땔감용 나무 채취로 황폐화된 산림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구공탄 보급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1952년 관계당국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구공탄 사용 설명회.-‘서울20세기 100년의 사진기록’ 자료사진
▼炊事장작 節約…三益火德 大量生産▼

산림녹화와 연료절약 문제가 국가적인 사업으로서 국민 전체에 보급되고 있는 요지음 장작 三십 동매로서 八인 분의 밥을 二십분 안에 훌륭하게 지을 수 있는 ‘삼익화덕’이 발명되어 관계당국의 신중한 시험을 거쳐 전 국민들에게 보급하게 되었다 한다.

삼익화덕은 수원농대교수 金益永씨가 오랜 연구를 걸쳐 발명하여 시험 끝에 성공한 것인데 동 화덕의 특징으로서는 첫째로 놀랄 만큼 나무를 적게 소비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무를 완전히 소화(燒火)시키는 관계로 연기가 없고 화덕의 전부가 밥을 짓는 솥에 집중하여 화력을 조금도 허비하지 않은 것이고, 셋째는 밥을 지을 때에 밥물이 넘지 않아 지어진 밥이 자양미를 가지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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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동 화덕은 (…) 본격적인 생산이 되어 국민 전체에게 보급되면 앞으로 국민의 취사에 사용하는 장작은 놀랄 만큼 절약될 것이라 한다.

<1954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서>

▼뗄감 아끼고 화력 센 ‘삼익화덕’ 등장▼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는 게 무엇?” 답은 아궁이. 땔나무를 해대는 통에 벌거숭이가 된 산들이 옛날부터 많았음을 보여주는 수수께끼다.

동네 이곳저곳 공터에 나무장이 서던 오랜 풍경은 1950년대의 서울에서도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새벽이면 장작을 가득 실은 우마차, 솔가지를 꾹꾹 눌러 담은 바소쿠리 지게를 진 나무장수들이 장터로 몰려들어 아침나절 잠깐 장사를 하고는 이내 흩어졌다.

일제강점기부터 ‘구공탄’이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6·25전쟁 직후의 피폐한 1954년 상황에서 서민들에게 구공탄은 호사일 뿐이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삼익화덕’이다.

수원농대(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전신) 시절부터 교수를 지낸 이은웅 전 서울대 교수(82)는 “손풍구로 작동하는 방식의 삼익화덕은 당시 나무 소비를 줄이고, 화력을 허비하지 않고, 밥맛을 좋게 하는 ‘세 가지 이익(三益)’을 준다고 해서 관심을 끌었던 게 사실”이라고 회고했다.

땔나무 소비는 그 뒤 점차 줄어 1980년대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다. 1961년 우리나라 에너지 소비에서 신탄(薪炭·땔나무와 숯)과 석탄의 비중은 각각 57.8%, 32.4%였으나 1979년 신탄의 비중은 6.7%로, 석탄은 27.4%로 각각 줄고 석유의 비중이 62.8%로 크게 늘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에너지원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전량 수입하는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나무 때던 그 시절이 언제였는지 모를 만큼 아까운 줄 모르고 에너지를 마구 써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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