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고인수]日에 선수 뺏긴 ‘제4세대 방사광’ 기술

  • 입력 2006년 8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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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2일 일본 이화학연구소 하리마 분소에 파견 간 연구원에게서 e메일을 받았다. 이틀 전에 시험운전 중인 SCSS라는 가속기에서 제4세대 방사광이 성공적으로 방출됐다는 소식이었다. 머리를 제일 먼저 스쳐 간 것은 연구 책임자인 신타케 쓰모루(新竹積) 박사가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가속기 분야에서 뛰어난 천재이고 독불장군 같은 이 친구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방법으로 제4세대 방사광을 2년 만에 만들어 냈다.

방사광이란 광속으로 달리는 전자가 자기장 속을 지나면서 방향을 틀 때 접선방향으로 방출되는 아주 강력한 빛을 말한다. 포항방사광가속기의 방사광은 태양보다 10억 배 이상 밝다. 방출되는 빛은 가시광선은 물론 자외선에서 X선에 이르는 모든 파장을 망라한다. 전 세계에서 최신형 방사광가속기는 13기가 가동되고 있으며 6기가 건설 중이다. 포스텍(포항공대)은 포스코와 정부의 지원으로 1994년 세계에서 5번째로 방사광 설비를 구축했다.

그런데 최신형 방사광 설비로 더는 연구를 할 수 없는 새로운 분야가 생겨나 이를 개척하기 위한 도전이 시작됐다. 급속하게 발전하는 분자생물학 분야에서는 단백질 시료를 결정체 형태로 힘들고 까다롭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 없이 단분자만으로 구조를 알아낼 수 있는 실험장치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 기술을 적용하면 세포막 구조를 분자 수준까지 알 수 있고, 바이러스의 침투 과정이나 약이 전달되는 과정을 영화처럼 찍을 수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고안해 낸 것이 제4세대 방사광가속기이다.

기존의 방사광가속기는 모두 원형이다. 새로운 방사광가속기는 직선형이다. 어떻게 빛이 나오는가? 직선으로 가속되는 대형 선형가속기의 마지막 부분에 남극과 북극이 아주 짧은 거리에서 교차되는 일명 언듈레이터라는 영구자석을 설치한다. 가속된 전자가 지나면서 좌우로 아주 빠르게 진행 방향이 바뀌는데, 이때 방출되는 방사광이 이미 진행한 전자와 적당히 간섭을 일으켜서 결국 방사광은 하나의 파장만으로 방출된다.

이 빛을 자유전자레이저 또는 제4세대 방사광이라고 부른다. 빛의 밝기는 태양보다 10억 배가 밝은 기존의 방사광보다 다시 10억 배가 더 밝다. 즉 태양보다 1000조 배나 밝은 빛을 만들 수 있다. 파장은 선형가속기의 에너지(수십억 eV·전자볼트 이상)와 언듈레이터의 길이(약 100m)를 적당히 선택하면 원자의 크기에 비견되는 0.1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옛날 표현으로는 1옹스트롬)까지 얻을 수 있다. 2008년까지는 X선 영역의 제4세대 방사광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유럽, 일본, 한국만이 건설 계획이 있고 그중 가장 앞선 미국이 2009년이 돼야 완공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포항가속기연구소는 길이 160m인 25억 eV급 선형가속기를 가동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장하면 손쉽게 제4세대 방사광을 만들 수 있다. 일본 과학계는 4세대 방사광 설비를 만들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포스텍 계획이 알려지자 일본 정부는 신타케 박사팀에 수백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2년 내에 소규모 시험 설비를 건설하고 자외선 영역에서 제4세대 방사광을 얻으면 4000억 원 규모의 X선 설비 구축을 지원한다는 조건이었다.

말은 우리가 먼저 꺼냈고 상세 계획도 먼저 준비했으나 일본에 선수를 빼앗겼다는 안타까움은 피할 수 없지만 아직도 기회는 남아 있다. 우리의 경험과 실력으로 1000억 원 규모의 건설비만 지원된다면 3년이면 완성할 수 있다. 국내 과학자들이 전인미답의 연구 분야를 개척할 수 있기를 학수고대한다.

고인수 포스텍 부설 포항가속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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