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찬순]워싱턴의 가을

  • 입력 2001년 10월 26일 18시 03분


미국의 버지니아 메릴랜드주 그리고 수도 워싱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포토맥강의 ‘포토맥’은 인디언말로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 ‘사랑의 강’은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시작해 600여㎞를 달려 대서양으로 들어간다. 워싱턴 주변의 포토맥 강변에는 단풍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다. 그러나 시내 분위기는 예년의 가을이 아니다.

백악관 앞뒤 도로는 모두 폐쇄됐다. 곳곳에 서 있는 경찰의 눈길이 매섭다. 일반 관광객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줄을 잇는 의사당과 스미소니언 박물관 거리도 한적하기만 하다. 포토맥강 건너편 국방부 건물에는 9·11테러의 상처가 아직 그대로 있다. 한쪽 부분이 움푹 파인 자동차 바퀴 같은 흉물스러운 모습이다. 수리비가 8억달러나 든다고 한다.

▼곳곳 테러-탄저병 공포 스며▼

미국의 고민은 가을과 함께 깊어가는 듯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TV에 나와 “나는 탄저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밝혀야 할 정도로 곳곳에 탄저병에 대한 공포가 스며 있다. 어디를 가나 온통 탄저병에 대한 얘기뿐이다. 여기에다 다른 생화학무기도 등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번지고 있다. 전선(戰線)이 두 개라는 부시 대통령의 말이 실감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인명피해도 점차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미군 특수부대원들의 희생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데다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이 자꾸 반전(反戰) 여론을 건드린다.

전 세계적인 반(反)테러전선을 강화하는 일도 예상보다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미국은 국제연맹 창설에 열을 올렸다. 무임승차나 중립국으로 남는 나라가 없는 범세계적인 집단안보체제를 만들어 전쟁을 막아 보겠다는 의도였지만 정작 미국 자신은 상원의 반대로 국제연맹에 들어가지 못했다. 80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또 다른 성격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중이다. 마음 맞는 나라끼리 손을 잡고 세력균형을 유지한 냉전시대의 동맹개념이 아니다. 전 세계가 모두 참여하는 반테러전선을 구축하려고 한다. 그러나 지구촌의 반응은 처음과 같지 않다. 외면하려는 나라가 눈에 띈다.

그런 미국에 북한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24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언론재단, 그리고 미국의 조지타운대학이 공동 주최한 한반도 관련 세미나에 참석한 미국측 인사들은 북한이 지금이라도 미국에 협조적으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무부의 잭 프리처드 한반도 평화회담특사는 “미국은 열려 있다. 황금 기회다. 무엇이든 하라”고 북한의 동참을 촉구했다. 어떤 정보든 북한이 갖고 있는 테러에 대한 정보는 모두 다 내놓으라는 주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은 또 범세계적인 대열에서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북한은 왜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는가. 자신들을 테러국가로 지목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증오심도 작용할 수 있을 것이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올바른 판단을 못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북한은 자기들의 과거사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요도호 납치범들도 내놓아야 하고 중동이나 아프리카 지역과 한 ‘검은’ 무기거래의 명세도 밝혀야 한다. 깨끗하지 못한 과거사를 밝히는 일은 그들의 자존심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바로 ‘면죄부’를 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자칫하면 더 구석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것이다. 북한은 이미 외무성 성명을 통해 테러리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것이 북한의 한계 아닐까.

▼北테러국가 지정 풀 수 없나▼

미국이 일방적인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큰 나라답게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 의사를 밝힐 수는 없는가. 테러국가로 지정해 놓고 반테러전쟁에 나서라고 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북한을 우선 테러국가 명단에서 빼준다고 하면 일이 예상보다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북한의 조명록 인민군 차수가 군복을 입은 채 백악관을 방문했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도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북-미관계의 앞날을 논의한 것이 바로 1년 전이다. 지금의 북-미관계는 그때와 대조적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북-미관계를 점차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 같다. 더 악화되기 전에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내야 한다.

남찬순<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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