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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김병종/도시에 세련된 옷을 입히자

입력 2001-09-02 18:32업데이트 2009-09-1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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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만한 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다. 원색들로 도배된 길거리 간판들과 볼썽사나운 도심의 벽화들이 내게는 그렇다. 마치 천박한 화장을 덕지덕지 한 채 길거리에 서 있는 여인네를 대하듯 민망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런 시각적 야만쯤은 고스란히 견뎌야 하는 것이 도시인의 삶이고 보니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긴 해도 도시인의 스트레스 중에는 이런 시각적 불쾌감도 상당히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별의 별 원색의 간판들이 눈을 찌르고 무질서한 시각적 자극물들이 피로를 가중시키는 것이니 어찌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도 복잡하게 살다 보니 우리가 그런 것을 미처 스트레스로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말이다. 울긋불긋 어지러운 간판은 그렇다 치고 요즘은 도시의 벽화들이 새로운 시각 공해로 등장하고 있다. 언제부터 도시의 벽에는 그림을 그려 넣어야 한다는 강박적 사고가 발동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빈 벽을 보기가 날로 어렵다. 잘 하지 못할 바엔 그냥 두면 좋으련만 도무지 빈 벽만은 못 견뎌 하는 것이다.

늘 지나치던 길거리 벽이 어느 날 아침 어울리지 않는 그림들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볼 때면 여간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벽화란 한번 그려지고 나면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기지 않는 한 여간해선 지워지지 않는다.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좋건 싫건 고스란히 보아야 하는 것이다. 도시 벽화가 전문가들에 의해 신중하게 다뤄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끔 성공적인 벽화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홍익대나 동국대 주변의 벽화들은 그 세련미와 전문성으로 인해 주변 분위기마저 한층 밝게 해준다. 솜씨로 보아 미대생들이 동원돼 공동작품으로 제작한 것인 듯싶다. 그런 벽화 앞을 지나갈 때마다 생각해 본다. 서울 시내의 벽들을 모조리 미대생들에게 할당해 공동작업을 해보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간판에서부터 벽화와 각종 구조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도시들을 한번 시각적으로 리노베이션할 단계에 와 있지 않나 싶다. 월드컵을 앞둔 차제에 전문가 집단이 대거 참여하여 도시의 시각적 연출 계획을 세워 볼 만한 때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유럽의 세련된 도시들을 바라보며 한숨만 쉴 것인가. 특히 500년 고도인 서울은 자연미와 인공미, 전통미와 현대미를 조화시킨 종합적 시각 리노베이션만 이루어진다면 세계적으로 아름답고 유서 깊은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의식이나 안목은 훈련에 의해 자라게 되어 있다. 한 가구회사 경영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똑같은 고객이라도 처음에는 복잡한 디자인과 번쩍거리는 가구를 선호하다가 점차 단순한 디자인의 무광 계통으로 선호도가 바뀐다고 했다. 예컨대 미적 안목의 성숙도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설명이었다.

월드컵은 코앞에 다가왔는데 빨강 노랑 초록 분홍의 원색 간판과 유치한 벽화들로 어지러운 도시 모습을 보고 외국인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그 빛나는 문화유산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혹시 형편없는 문화 후진국이나 색맹들의 나라로 보지나 않을까.

원래 우리는 이토록 천박한 미관을 가진 민족이 아니었다. 미에 관한 한 높고 깊고 그윽했다. 격조가 있었다. 생활 정서와 미술 정서를 조화시킬 줄 아는, 그래서 민예 미술에서 수준 높은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던 민족이었다. 가옥과 의복과 생활공간에서 모두 그랬다. 우아하게 흐르는 기와집 추녀와 한복의 선, 소반이나 그릇을 비롯한 삶의 소도구마다 이런 미의식은 스며들고 넘쳐흘렀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격조 있고 은은한 미의 정서는 깨져버렸다. 참을 수 없는 천박으로만 흐른다.

아직도 우리는 시각공해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시각문화야말로 삶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미적으로 쾌적하고 세련된 도시에서 살게 하고픈 소박한 꿈은 결코 백일몽일 수 없다.

김병종(화가·서울대 교수, 본보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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