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고쳐주오”… 재계-정부기관 민원 봇물

  • 입력 2004년 8월 15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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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단체와 정부 부처들이 초중고교 교과서 개정 때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교육인적자원부에 교과서 수정을 요구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이런 요구는 가치관 정립 시기의 청소년에게 정확한 지식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지만 이 가운데는 일방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주장도 있어 교과서에 보편타당한 내용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한 심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교과서 수정 요구=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해 10월 “현행 중고교 교과서에 시장경제의 기본원리와 본질, 기업가 정신 등에 대한 내용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있다”며 교과서 62곳의 수정을 건의했다. 교육부는 교과서 저자들과 협의를 거쳐 올해 초 이 가운데 42곳을 수정했다.

대한상의 손영기 경제교육팀장은 “학생들에게 기업에 대한 정확한 교육이 필요한 만큼 앞으로 교과서 개정 때 기업 정보가 더 많이 포함되도록 교육부에 건의서를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노동교육원은 한 중학교 교과서에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피땀으로 배를 불리고 있다”고 표현돼 있는 등 현행 교과서 가운데 37곳에 문제를 제기해 올 6월 교육부로부터 25곳을 고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노동교육원 관계자는 “산업혁명 당시의 문제점을 다룬 내용이지만 너무 자극적인 표현은 노사관계의 이해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부처 “우리 입장 반영해 달라”=건설교통부는 3월 국토개발 관련 내용을 교과서에 제때 반영해 달라고 교육부에 요청했다.

중고교 교과서에 시화호의 수질이 개선되기 시작한 1997년 이전의 사진을 싣거나 판교 신도시 건설계획 확정 이전의 내용이 수록돼 있는 등 국토개발 상황이 적기에 반영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도 고교 교과서에만 실린 국민연금 관련 내용을 초·중학교 교과서에도 반영하고 각종 사회보험제도를 충분히 다뤄달라고 요구했다.

금융감독원은 카드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급증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2002년부터 ‘신용교육’을 교과서에 넣어달라고 요구해 내년부터 중고교 교과서에 ‘신용관리’ ‘바람직한 금융생활’이란 내용으로 실리게 됐다.

교육부 노희방(盧熙芳) 교육연구관은 “부처마다 중요한 현안 정책을 교과서에 포함시킬 수 없느냐는 문의나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잘못 배우면 고치기 힘들다”=단체나 정부 부처들이 교과서 개정에 발 벗고 나서는 것은 학생들이 한번 잘못 배울 경우 나중에 이를 바꾸기가 어렵고 교과서는 돈을 들이지 않고 사회적 이슈나 정책을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

교육부는 정당한 수정 요구는 수용하겠지만 교과서는 보편타당한 내용을 다뤄야 하는 만큼 일방적 주장이나 편향적인 시각을 담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앞뒤 문맥을 살피지 않고 일부 표현만 문제 삼거나, 저자의 의견이 아닌 인용문에 시비를 거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중앙대 허형(許炯·교육학) 교수는 “사회가 다양해지고 있는 만큼 앞으로 교과서를 만들기 전에 관련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의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 정제된 내용을 싣는 방안을 생각해 볼 시점”이라고 말했다.


홍성철기자 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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