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하늘나라서 보내온 ‘작은 기적’

  • 입력 2009년 8월 31일 02시 59분


사진 제공 장영희 교수 추모 팬카페
사진 제공 장영희 교수 추모 팬카페
故장영희교수 조의금-인세 등 모은 5억 서강대 기부… 유족 “고인의 뜻”

《“바다가 갈라져 땅이 되고 몇백만분의 1 확률로 몇십억 원짜리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일만 기적인 줄 알았는데 이들이 말하는 기적의 의미가 새삼스럽다. 우리 조카 말처럼 도둑이 훔친 물건을 돌려주는 일, (가수) 김장훈이 말하듯 남을 좋아해 주는 일,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는 일, 그리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선행도 일도 따지고 보면 다 작은 ‘기적’들인지도 모른다.”(본보 2008년 1월 7일자 동아광장에 실린 장영희 교수의 칼럼 ‘우리 곁에 있는 기적’ 중에서)》

어렵게 공부하던 제자들 생전에도 남모르게 도와
인세 받기로 돼있던 어머니“학교에 전달하자” 뜻모아

암 투병 끝에 5월 세상을 떠난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향년 57세)가 하늘나라에서 ‘작은 기적’을 부쳐왔다. 장 교수의 유가족이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유작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등 저작 인세와 퇴직금, 조의금 등을 모은 약 5억 원을 서강대와 서강대 예수회에 전달키로 했다. 유가족은 30일과 9월 1일 이틀간 이종욱 서강대 총장 등을 방문해 세부사항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30일 밝혔다.

○ 어려운 학생 장학금, 신부 양성

“아직 총장님도 만나기 전이고 해서 조용히 진행하고 싶었는데….”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장 교수의 막내동생 장순복 씨(47·여)는 조심스러워했다. 몇 차례나 인터뷰를 사양한 그는 “사실 장례식 직후부터 고민해 온 일인데 언니의 연구실 등 각종 문제를 다 처리하려다 보니 다소 시간이 걸렸다”며 어렵사리 말문을 뗐다. 장 씨는 “언니가 힘들게 공부하는 제자들을 안타까워하며 남모르게 돕곤 했다”며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공부를 다 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걱정했던 언니의 뜻을 가족이 이어받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장 교수의 남다른 제자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세상을 떠나기 한 달여 전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장례식에 나와 일을 도울 대학원 제자들을 위한 용돈을 남기고 제자들을 격려하는 e메일을 남겼다는 사실이 죽음 직후 전해져 가슴을 적시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장 교수는 학교의 신부(神父) 양성에도 꾸준히 관심을 보여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은 이런 장 교수의 생전의 뜻을 살려 1억 원가량은 신부를 양성하는 예수회에, 4억 원가량은 장학금이나 발전기금의 형태로 학교에 전달한다는 계획이다.

○ 암 투병 중에 쓴 글… 그리고 그 인세…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장 교수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작성한 글이다.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이 절절하게 묻어 있다. 유족들 가운데 서강대에 5억 원을 기부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어머니 이길자 씨(82)였다고 한다.

동생 장 씨는 “원래 인세는 다 어머니께서 받으시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머니가 이 돈을 학교에 전달하자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라며 “인세는 암 투병을 하면서도 펜을 놓지 않았던 언니의 피땀 어린 글이 낳은 결과물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돈…”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모아진 사랑은 장 교수의 세례명 영명축일과 생일인 다음 달에 전달될 예정이다. 때마침 9월 8일이 장 교수의 세례명 ‘마리아’의 영명축일(가톨릭 신자가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성인의 축일)이고 9월 14일은 장 교수의 생일이다. 기금에는 장 교수의 이름이 붙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동생 장 씨는 “언니는 아버지(고 장왕록 한림대 영문학과 교수)의 호를 딴 ‘우보(又步) 장학금’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지만 이미 그런 논문상이 있어 이번 기금은 언니의 이름을 따기로 했다”고 전했다.

조심스레 인터뷰를 하던 동생은 몇 번이고 이 말을 강조했다. “이건 모두 참 맑았던 사람인 우리 언니의 뜻이에요. 가족은 다 언니의 뜻을 대신 전할 뿐입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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