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24시/실속파 신세대④]"영어 잘하는게 죄?"

  • 입력 2002년 4월 3일 17시 26분


H기업에 다니는 문모씨(29)는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의 영어를 구사한다. 중학교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서 대학까지 나왔기 때문.

문씨는 회사에 들어갈 때 사장이 되겠다는 커다란 포부를 가졌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하는 일은 주로 ‘의전’이다. 해외에서 바이어나 컨설턴트 등 손님이 오면 지방공장으로 같이 내려가서 설명해주고 공장 임원들의 말을 통역해주는 일이다.

회사 선배들은 한술 더 뜬다. 공짜로 영어공부 할 ‘욕심’인지 문씨만 만나면 기를 쓰고 손짓발짓하며 영어로 말을 붙이려 애쓴다. 회식자리에도 불러내 영어로 얘기하자고 하는가 하면 최근엔 은근히 따로 팀을 만들어 영어수업을 하자는 제안까지 해왔다. 문씨는 차라리 외국 은행으로 자리를 옮길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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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인 K사에 근무하는 이모씨(25·여)는 입사 2년차. 토익 900점이 넘는 영어실력 덕분에 어학특기자로 선발됐지만 배치 받은 곳은 기획관리팀이다. 이씨는 요즘 회사에 대고 외치고 싶다. ‘이럴려면 어학실력은 왜 따졌느냐’고….

세계적인 대기업에서 해외영업을 해보겠다는 꿈은 엉망이 됐다. 지난해 두어 건의 문서 번역을 했을 뿐 눈을 씻고 찾아봐도 회사에서 어학실력을 발휘할 일이 없다. 그는 생각다 못해 있는 영어실력마저 줄어들까 봐 주말마다 별도로 영어학습을 한다.

이씨와 같이 입사한 김모씨는 얼마 전 회사를 나갔다. 토익 만점을 받은 그는 원하던 해외마케팅을 하지 못하고 임원들의 통역전담 비서를 하다가 경영학석사(MBA)를 따겠다며 유학을 가버렸다.

이씨는 “요즘은 어학인플레이션이다. 수십 대 1에서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고 입사한 신입사원들은 토익만점 토플만점은 물론이고 원어민(原語民) 수준인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업들이 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뿐더러 당장 필요한 일만 부려먹을 뿐 본인이 원하는 일을 시켜주지 않아 불만이라는 것이다.

대기업에 근무하다 몇 년 전 홍보대행사로 자리를 옮긴 차의선씨(33)도 비슷한 경우. 그는 “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은 한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회사가 외국어를 잘하는 직원들을 문서번역이나 영작문 등 단순업무만 시키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 그는 “요즘 젊은 사원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면서 “애써 뽑은 인재들에게 능력 발휘의 기회를 주는 것은 회사의 몫”이라고 말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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