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교는 개가죽, 사병은 종이로 만든 갑옷 입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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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군인들은 어떤 방한복 입었을까

TV 역사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투 장면(왼쪽). 철갑옷을 입은 장교들은 고증이 충실한 편이지만 병졸들의 지갑(紙甲)은 미처 재현해내지 못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조선왕실 용봉문 갑옷의 모습. 동아일보DB
TV 역사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투 장면(왼쪽). 철갑옷을 입은 장교들은 고증이 충실한 편이지만 병졸들의 지갑(紙甲)은 미처 재현해내지 못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조선왕실 용봉문 갑옷의 모습. 동아일보DB
《 말 그대로 엄동설한이다. 영하 15도 안팎의 강추위가 수시로 찾아온다. 스멀스멀 옷깃을 파고드는 한기(寒氣) 앞에서는 천하장사라도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다. 예나 지금이나 추위를 가장 많이 느끼는 사람은 군인들이다. 적과 팽팽하게 대치하는 국경의 병사들은 더욱 그렇다. 아무리 따뜻한 옷을 입는다 해도 외로운 마음속까지 따뜻해지지가 않는다. 요즘이야 각종 첨단소재로 만든 방한복이 나와 조금 낫지만, 현대 이전의 군인들은 어땠을까. 》
방한엔 개가죽이 최고

조선시대 군사들에겐 추위가 큰 걱정거리였다. 겨울철마다 국경 너머의 적보다는 겨울이라는 ‘원초적인 적’과 대결해야 했다. 그들이 겨울철에 갑옷을 입었던 방법을 살펴보면 추위 극복을 위한 노력을 알 수 있다.

당시 가장 보편적이었던 갑옷은 철갑(鐵甲)이다. 특히 작은 철판을 가죽 끈으로 이어 붙여 만든 찰갑(札甲)을 많이 입었다. 철로 만든 갑옷은 웬만해선 적의 창칼이 쉽게 뚫지 못하며, 지휘관급 이상 장교들이 주로 착용했다.

문제는 갑옷의 주재료인 철판이 무겁고 추위에도 취약했다는 점이다. 비록 갑옷 안에 내갑(內甲)이라 불리는 두꺼운 솜옷을 받쳐 입지만 체감온도 영하 20도∼영하 30도의 칼바람이 부는 곳에서는 체온 유지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강력한 추위에 철판을 엮은 가죽 끈이 얼어서 끊어지는 일이 많았다. 해마다 가죽 끈을 교체해야 갑옷의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장교들이 철갑 대신 가죽으로 만든 피갑(皮甲)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피갑에는 방호력을 높이기 위해 삶지 않은 돼지나 소, 노루, 개의 생가죽을 많이 썼다. 이 중 개가죽은 추위에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보온력이 뛰어나 행군 시 야외에 간이숙소를 지을 때 지휘관의 잠자리에는 개가죽을 사용했다. 개가죽으로 만든 배자(저고리 위에 덧입는 조끼 모양의 옷)와 버선에 토시도 애용됐다. 개가죽은 산짐승 가죽보다 쉽게 구할 수 있고 소나 돼지가죽보다 값도 쌌다.

종이 갑옷이 추위를 막는다?

일반보병들은 종이로 만든 지갑(紙甲)을 선호했다. 일정 두께 이상으로 만든 지갑은 보온력이 뛰어나 겨울에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또 종이 재질이라 무게도 가벼워 병사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북방의 국경지역에선 무릎 아래까지 덮어주는 긴 지갑을 만들어 추위에 대응했다.

그런데 일반 군사들이 지갑을 선호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비용 문제에 있었다. 장교는 국가에서 녹봉을 받고 갑주나 무기 등을 지급받았지만 군역을 지는 일반 군사들은 갑옷을 직접 장만해야 했다. 이 때문에 가장 만들기 쉽고 철갑옷보다는 비용이 적게 드는 지갑을 애용했다. 조선시대에는 갑옷에 오방(五方)색 즉, 다섯 가지 색깔을 입혀 소속 부대를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갑은 색을 입히기가 쉽고 그 색을 유지할 수 있어 편리했다.

종이로 만든 지갑의 방호력은 어땠을까. 그 제작 방법을 살펴보면 ‘칼날에 쉽게 잘리지 않을까’란 선입견이 사라진다. 지갑 한 벌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지 10근(약 4∼5kg)이 필요하다. 이것을 송진 3되를 이용해 한 장씩 겹겹이 붙이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면 감히 철갑에 비할 수는 없지만 웬만한 방어는 가능한 강도가 된다.

오히려 문제는 방호력보다는 비싼 종이값에 있었다. 지갑 제작에 들어가는 종이의 값도 일반 군역 대상자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국가에서는 비변사를 통해 과거 응시생 중 낙방자의 시험지를 모아 각 도의 감영이나 병영에 보내 지갑 제작에 쓰도록 배려했다. 과거 시험지로 만든 지갑은 수많은 한자가 이곳저곳에 들어간 모양이 되어, 요즘 첨단 패션의 ‘문자 디자인’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현란했다고 한다.

과거시험 낙방자들의 시험지가 부족할 때는 종이 도둑들이 담장을 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특히 공물로 지갑을 만들어 바쳐야 하는 사람들은 남의 집 귀한 서책이나 문서를 비롯해 심지어 족보까지 훔쳐갔다. 이는 한동안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그래도 종이가 부족할 때는 말린 짚단 겉에 종이 몇 겹을 대충 붙인, 가짜 종이 갑옷을 납품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런 불량 지갑은 실제 전투에서 아무런 방호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국가에서는 가짜 지갑을 바친 사람에게 곤장세례와 함께 진품 제작비용의 몇 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 한편 지갑은 겨울엔 보온효과가 뛰어나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면 좀벌레가 갑옷을 깊숙이 먹어 들어가 부서지는 일이 많았다. 해마다 봄이 되면 좀이 슬지 않도록 지갑을 햇볕에 널어놓거나 표면에 송진을 계속 발라야 했기에 관리의 수고로움도 만만치 않았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정든 고향집을 떠나 군 생활을 하는 병사들에게는 추위가 적군보다 더 두려운 존재가 되곤 했다. 연일 한파가 몰아치는 요즘, 기나긴 휴전선 155마일(약 250km)을 지키는 국군 장병들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진다.

최형국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역사학 박사
#조선시대#갑옷#방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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