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새벽에도 건물 심한 진동…칠레 지진 공포는 현재진행형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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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특파원, 산티아고-콘셉시온을 가다

부분 운항 산티아고 국제공항, 직원들 간이천막서 근무
시내 차분하지만 일부 사재기
주유소 제한 급유 실시, 17달러어치만 넣을 수 있어

3일 오후 8시 55분 칠레 수도 산티아고 국제공항. 브라질 상파울루를 출발한 칠레 최대 항공사인 랜칠레 항공 751기가 착륙하는 순간 350명의 승객은 일제히 “브라보”를 외치며 환호했다. 이날은 지난달 27일 강진으로 폐쇄됐던 산티아고 공항 기능이 일부 회복되면서 처음으로 민항기 이착륙이 허용된 날. 칠레인 승객 중 일부는 “귀국이 최대 5일이나 늦춰져 발을 동동 굴렀다”며 안타까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교차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뒤편 창가 쪽에 앉아 있던 가르시아 팸필리오니 씨(37)는 비행기가 칠레 국경선을 이루는 안데스 산맥을 넘기 시작하자 시선을 창밖에 고정시킨 채 단 한순간도 떼지 않았다. 만년설이 겹겹이 쌓인 산맥을 지나 어둠이 내린 산티아고 시내 불빛이 보이는 순간,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내 오티즈 미란다 씨(33)를 꼭 껴안았다. 미란다 씨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가르시아 씨는 “어렵게 잡은 항공편을 놓칠까 봐 수속 창구 앞에서 노숙을 하며 노심초사했다”고 말했다.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로스안데스에 산다는 트리니다드 라바카 씨(52)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브라질 휴양지 부지우스 리조트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라바카 씨는 “지진이 발생한 도시 콘셉시온에 사는 동생 가족이 걱정”이라며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휴대전화 전원을 켜고 수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지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초유의 재난이 던진 아픔을 겪고 있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칠레인들의 표정은 전반적으로 어두웠지만 남미인 특유의 낙천성 탓인지 가슴 밑바닥에는 재난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항공 관련 사업을 한다는 빈센트 메디아비야 씨(55)는 “현재 국가지도자들이 침착하게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으며 칠레 국민도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충분한 저력이 있다”며 “머지않아 정상을 회복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공항은 평상시의 15% 정도의 이착륙을 허용하고 있었다. 공항에는 에어프랑스, 에어캐나다 소속 항공기 4, 5대가 눈에 띄었다. 활주로에 내린 비행기는 터미널에 있는 연결통로가 아닌 활주로와 연결통로 중간에 임시 하차대를 설치해 승객들을 내리게 했다. 착륙한 비행기에서 임시 하차대를 통해 나오는 시간은 평균 1시간 정도가 걸려 아직 정상 운항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항관계자는 “승객이 입국수속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통로에 화재가 나 터미널 외부에 임시 세관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청사 안이 아닌 간이 천막에서 공항업무를 보고 있었다.

오후 10시 반 입국수속을 모두 마치고 들어선 외곽도로는 비교적 평온했다. 늦은 시간 탓인지 차량 통행이 잦지 않았고 주변 도로의 지진 피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공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일부 교량의 이음매가 끊어진 구간이 간헐적으로 보였고 교량복구 작업도 진행되고 있었다.

산티아고 시내 역시 차분한 모습이었다.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청소차량들이 다니면서 도시를 정돈하고 있었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칠레KOTRA 무역관 서정혁 차장은 “강진으로 한때 끊겼던 전기와 수돗물 공급이 90% 이상 복구되면서 시민들의 일상도 정상을 찾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상점들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문을 닫았고 회사원들도 퇴근길을 서두르기는 했지만 버스는 물론이고 지하철도 평소처럼 밤 12시까지 정상 운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3일 동안 크고 작은 여진(餘震)이 100차례 이상 오는 등 지진 공포가 여전히 도시를 짓누르고 있었다. 4일 오전 1시경에도 시내 12층 건물에 있는 KOTRA 무역관 사무실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상점에서는 일부 사재기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하는 시민들은 손수레 두세 개를 끌고 다니며 물과 파스타, 쌀, 밀가루 등 생필품을 보이는 족족 쓸어 담고 있었다.

어렵사리 차편을 구해 콘셉시온으로 출발한 것은 4일 오전 6시경. 동이 채 트기 전이었다. 콘셉시온까진 550km를 차로 이동해야 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도로 양 옆으로는 와인의 나라답게 포도농장과 옥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자세히 보니 이곳 건물들 역시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내린 지진의 흔적이 역력했다. 중간 중간 도로가 무너져 비포장 우회도로로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주유소에서도 지진의 여파가 느껴졌다. 주유소 직원은 “L당 600페소(약 1달러) 정도로 차량당 1만 페소(약 17달러)어치만 넣을 수 있다”며 “정부에서 위기상황에 대비해 제한을 둔 것”이라고 말했다. 콘셉시온으로 다가갈수록 왠지 바람이 더 차가워졌다.

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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