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김현진] 스타일 인 셀럽 ④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10일 13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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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모피(fur)를 입는다? … 모피와 '악녀'의 함수 관계

SBS 드라마 \'천사의 유혹\'의 주인공 커플. 배우 이소연은 악녀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모피를 즐겨 입는다. 사진 속 모피 조끼는 올 겨울 최고의 패션 아이템이다.
SBS 드라마 \'천사의 유혹\'의 주인공 커플. 배우 이소연은 악녀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모피를 즐겨 입는다. 사진 속 모피 조끼는 올 겨울 최고의 패션 아이템이다.
최근 한국 드라마 속 최고의 악녀는 SBS '천사의 유혹'의 주인공 주아란(이소연 분)이다.

주아란은 복수를 위해 원수 집안의 아들에게 접근해 결혼하고, 자신이 낸 교통사고를 남편이 낸 것처럼 위장하는가 하면 급기야는 남편을 죽이려고 거동 못하는 남편이 있는 집에 고의로 불을 지르는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사실 탤런트 이소연의 얼굴은 전형적인 '착한 얼굴'이다. 크고 처진 눈 덕분에 마냥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이다. 그래서 배역의 특성에 맞게 꼬리 아홉 개 달린 악녀로 둔갑하기 위해 어떤 장치를 해야 할지 적잖은 고민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가 선택한 '악녀 패션 3종 세트'는 날카롭게 꼬리를 올린 아이라인, 굵은 곱슬머리, 그리고 모피였다.

이 가운데 모피는 표독스러운 여우처럼, 때로는 순진한 토끼처럼, 때론 부드러운 밍크처럼 복잡다단한 주아란의 성격을 묘사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12 월7일 방영분에서 주아란은 칼라 부분에 갈색 털이 달린 빨간색 코트를 입었다. 동생의 행방을 물으며 시어머니를 몰아세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 뻔 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다음날엔 시댁 가족을 길거리로 쫓아내는 대목에서 모피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는 모피 코트보다 모피를 부분적으로 활용한 아이템을 주로 입고 나왔는데 이는 젊고 패셔너블한 인상을 주었다. 올 겨울 최고의 패션 아이템이 바로 모피 조끼나 볼레로이기 때문이다.

영 화 '인사동 스캔들'에서 '팜 파탈' 배태진으로 출연한 엄정화 역시 그림을 둘러싼 음모, 반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캐릭터의 카리스마를 스모키 메이크업과 모피로 표현했다. 엄정화는 메이크업만 조금 손보면 쉽게 악녀 스타일로 변신할 수 있는 생김새이지만 그의 작은 몸을 커버하고 화려한 존재감을 돋보이게 하는 데에는 밝은 색 모피코트 만한 소품이 없었을 듯싶다.

악녀들은 왜 모피를 입는 걸까.

부자와 악덕을 상징하는 모피?

영화 '인사동 스캔들'에서 '팜 파탈' 배태진을 연기한 배우 엄정화는 영화 속 캐틱터의 카리스마를 스모키 메이크업과 모피로 표현했다.
영화 '인사동 스캔들'에서 '팜 파탈' 배태진을 연기한 배우 엄정화는 영화 속 캐틱터의 카리스마를 스모키 메이크업과 모피로 표현했다.
지난해 방영된 KBS2 주말드라마 '내 사랑 금지옥엽'에서 남자 주인공의 전처인 악녀 서영주(최수린)처럼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양심을 버리거나 신분 상승의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가 자주 선택하는 것이 모피다. 가난한 사랑 대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택한 이들의 인생역전을 표현하는 데는 화면을 뚫어져라 봐도 보일 듯 말 듯한 다이아 반지보다는 한 눈에도 럭셔리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모피가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모피는 아들이 사랑하는 가난한 여자의 면전에 돈을 뿌리고 오는 못된 '사모님'들도 애용하는 아이템이다.

악녀가 모피를 입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단순한 이분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즉 '부자=탐욕스럽고 못됨' '가난한 자=양심적이고 착함'이라는 이분법을 되풀이하는 한국 드라마의 게으름 말이다. 하나의 장르로 굳어진 '막장 드라마'가 즐겨 사용하는 코드 역시 빈부차이에 의한 이분법이다. 이런 드라마들은 부자를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모피를 사용한다. 다시 말해 부자는 나쁘다 → 부자는 모피를 입는다 → 고로 악녀는 모피를 입는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먹고 살만해진 1990년, 2000년대에 들어서도 드라마들이 가난함을 선(善)으로, 부자를 악(惡)으로 그리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외환위기와 글로벌 경제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기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 위안을 주기 위한 소재로 '캔디형' 또는 '억척형' 캐릭터들이 자주 등장했고 이들을 방해하는 인물들은 주로 (값비싼 모피 코트를 입을 수 있을 정도의) 부자였다.

물론 모피 특유의 카리스마와 아우라 때문에 '팜 파탈'의 좋은 친구로 등장하게 됐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모피는 화려한 메이크업과 장신구가 없어도 한 눈에 사회적, 경제적, 미적 가치를 동시에 느끼게 할 정도로 존재감이 강하다.

정말로 ‘악마’는 모피를 입는다

동물보호단체인 페타 회원 수십 명이 2007년 1월 21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모피를 얻기 위한 동물 학살을 비난하며 집단
나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피켓에는 ‘단지 코트를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라고 적혀 있다. 바르셀로나=AP 연합뉴스
동물보호단체인 페타 회원 수십 명이 2007년 1월 21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모피를 얻기 위한 동물 학살을 비난하며 집단 나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피켓에는 ‘단지 코트를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라고 적혀 있다. 바르셀로나=AP 연합뉴스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영화와 드라마, 심지어 만화에서도 모피를 입은 여성이 악역으로 출연한다. 그러나 이는 한국처럼 빈부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 아니다. 동물 보호와 안티 퍼(fur) 캠페인 차원인 경우가 많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1961)의 악녀 크루엘라 드빌이 40년 가깝게 어린이들의 '공공의 적'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귀여운 강아지들의 가죽과 털로 옷을 지어 입으려는 흑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개털 코트'야 만화적인 설정이라 가능했던 소재였겠지만 말이다.

서구 사회에선 동물보호단체인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인 PETA(페타)의 타깃이 돼 '배드 걸(bad girl)'로 낙인찍힌 셀러브리티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는 1994년 페타의 광고 캠페인, '모피를 입느니 차라리 벗겠어요(rather go naked than wear fur)'에 참여했던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이 이번 시즌 미국의 최고급 모피 브랜드 '데니스 바소'의 광고 모델 계약을 체결한 데 이어 한 패션잡지에 모피 특집 화보 모델로도 등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보그 편집장 역을 연기했던 배우 메릴 스트립의 모피 숄이 눈에 띈다. 실제로 안나 윈투어 미국 보그 편집장도 모피를 즐겨 입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보그 편집장 역을 연기했던 배우 메릴 스트립의 모피 숄이 눈에 띈다. 실제로 안나 윈투어 미국 보그 편집장도 모피를 즐겨 입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소설과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모델인 안나 윈투어 미국 보그 편집장 역시 모피를 즐겨 입는다. 전 세계 패션 업계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그는 더더욱 페타의 주요 타깃이 돼 왔다. 페타 회원들은 항의의 표시로 윈투어 편집장이 참석한 패션쇼장 입구 계단에 동물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페인트를 뿌려 놓는가 하면 모피 코트에 밀가루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윈투어의 모피 사랑은 변함없는 것으로 보인다. 올 초 한 인터뷰에서 그는 "모피는 여전히 패션의 한 부분이며 미국판 보그 또한 모피 관련 패션 트렌드를 계속적으로 보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올 10월 런던의 명품 쇼핑가에서 열린 반(反) 모피 시위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외친 구호는 바로 '악마는 퍼를 입는다(The Devil Wears Fur)'였다. 이들은 베르사체, 알렉산더 맥퀸, 장 폴 고티에, 루이뷔통, 펜디 등 명품 브랜드들이 올 가을, 겨울 시즌에 유난히 많은 모피 제품들을 내 놓은데 대해 항의하며 가두 행진을 벌였다.

그런데 여론이 두려워 모피 입기를 꺼리는 분위기나 모피 입은 스타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1990년대에 비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 서구 언론들의 분석이다.

키이라 나이틀리, 제니퍼 로페즈, 마돈나, 에바 롱고리아, 케이트 모스는 최근 밍크, 양, 여우 털 코트를 입고 공식 석상에 당당히 나타났다. 빅토리아 베컴은 블랙 밍크 재킷을, 드류 배리무어는 베이지색 모피 숄을 두른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모피를 입느니 차라리 벗겠다'는 동물 보호 캠페인에 참여했던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은 최근 모피 특집 화보 모델로 등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모피를 입느니 차라리 벗겠다'는 동물 보호 캠페인에 참여했던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은 최근 모피 특집 화보 모델로 등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캠벨과 함께 모피 반대 캠페인 광고를 찍었던 또 다른 슈퍼 모델들, 신디 크로포드, 크리스티 털링턴, 클라우디어 쉬퍼, 엘 맥퍼슨 가운데 지금까지 '신념'을 지킨 이는 털링턴 밖에 없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나머지 모델들은 공식 석상에서, 또 패션쇼 무대에서 수차례 모피 소재 의류를 뽐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 때문인지 전 세계의 모피 매출은 늘고 있는 추세다. '가디언'에 따르면 2007년 전 세계의 모피 매출은 총 100억 파운드를 돌파했으며 2008년에는 이 수치가 130억 파운드로 증가했다. 최근 몇 년 새 모피 산업은 매년 10%대 이상의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모피를 입기는커녕,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조차 하지 못했던 스타들이 다시 모피를 두를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우선 21세기 들어 전 세계인의 관심이 기후 변화, 아동의 절대 빈곤과 같은 이슈에 쏠리면서 모피 반대 캠페인은 상대적으로 그 인기가 시들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부 언론의 해석이다.

또 모피 생산 회사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현대인의 심리를 역으로 이용, '모피는 자연친화적이다(Fur is Green)'는 캠페인을 벌인 것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이고 있다. 모피는 합성 소재 섬유에 비해 생산 시 에너지가 덜 들고,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물론 정치인이나 정치인의 아내라면 모피를 입는 것은 여전히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프랑스의 퍼스트레이디 카를라 부르니 여사는 모피 소재 아이템을 입지 말라는 페타의 경고에 "나는 윤리적인 사육장에서 자라 자연사한 동물의 털로 만든 모피 의류만을 입으며, 죽은 동물의 부산물을 활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본다"는 정중한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편지를 쓰면서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얼마나 신중을 기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꼭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더라도 동물 보호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을 때 '평소 모피를 즐겨 입는 배우 X파일'에 등장할 새라 조심하는 스타들도 여전히 있다. 또 진심에서 우러나 동물의 털을 인간이 활용하는 데 반기를 드는 '소신파'들도 많다.

옷 한번 걸치는데도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모피는 이처럼 세계적인 셀러브리티들도 '용기'와 '신념'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운 아이템이다.

당돌하고 도전적인 '악녀' 캐릭터와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이유도 모피가 이처럼 비범한 결단력을 필요로 하는, '기'가 센 옷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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