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中企돈줄 뚫어주자]<上>뒤틀리고 구멍난 자금지원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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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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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 뛰어나도 보증-담보 없으면 “대출 불가”

대출 못받아 2년째 텅빈 공장 8일 찾은 인천 남동공단의 A자동차생산설비 부품업체. 2009년 공장을 매입한 이 업체는 당초 이 건물 2층에 작업장을 설치하려고 했으나 설비투자 자금을 구하지 못해 사실상 놀리고 있었다. 인천=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대출 못받아 2년째 텅빈 공장 8일 찾은 인천 남동공단의 A자동차생산설비 부품업체. 2009년 공장을 매입한 이 업체는 당초 이 건물 2층에 작업장을 설치하려고 했으나 설비투자 자금을 구하지 못해 사실상 놀리고 있었다. 인천=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자동차 생산설비 부품업체 A사의 건물 2층은 660m² 규모로 인근 공장 가운데 꽤 넓은 편이지만 2년째 텅 비어 있다. 이 회사 최모 사장(55)은 2년 전 이 공장을 인수하면서 2억 원 정도를 은행에서 빌려 새 기계설비를 구입해 2층을 채우려 했다. 공장을 풀가동하려던 그의 계획은 왜 틀어진 것일까.

○ 4000만 원 빚보증에 발목 잡힌 기업


최 사장은 2009년 초 보증 대출을 받기 위해 기술보증기금(기보)을 찾았지만 심사도 받지 못하고 거절당했다. 8000만 원에 이르는 지인의 채무에 보증을 선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절반을 갚아 실질적인 보증채무는 4000만 원밖에 안 됐지만 ‘다른 사업체의 빚을 이어받은 경우에는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보증신청 자격이 없다’는 규정 때문에 보증서를 발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최 사장은 “우리 회사의 1년 매출액을 감안하면 4000만 원 정도의 보증은 위험요인이 아니라고 수차례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기보 보증을 받은 적이 있는 중소기업은 이후 실적이 다소 나빠지거나 업황이 좋지 않아도 두 번, 세 번 추가로 보증을 받을 수 있지만 신규 보증 신청자의 경우 사업이 유망하더라도 대출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보증 심사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그는 “직장인도 빚이 4000만 원가량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이 정도 빚보증 때문에 보증 신청 자체를 거절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때로는 사양업종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보증서 발급을 거절당하기도 한다.

남동공단에서 가구업체 B사를 운영하는 김모 사장(51)은 지인들과 함께 2002년 가구회사를 차렸다. 9년간 임대 공장에서 사업을 하던 그는 지난해 말 지금의 공장을 사기 위해 신용보증기금(신보)에 2억 원의 보증을 신청했다. 하지만 최종 보증금액은 신청 금액의 절반인 1억 원. 신보는 가구산업이 사양산업이어서 2억 원은 곤란하다고 했다.

김 사장은 “2000년대 이후 중국 가구업체의 저가 공세에 고전하던 한국 가구업체들이 기술력 우위, 임금 상승에 따른 중국업체의 가격 경쟁력 약화를 틈타 다시 살아나고 있다”며 “이럴 때 발 빠르게 투자를 해서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데 사양산업이라니 답답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그는 가족과 친구들을 붙잡고 몇 달을 매달린 끝에 1억 원을 마련해 간신히 공장을 샀다.

○ 잘나가는 기업에만 매달리는 은행


중소기업이 은행을 찾아가더라도 충분한 담보가 있거나 대기업 납품회사인 경우를 제외하곤 대출심사의 관문을 통과하기 어렵다.

경기 광주시의 철 코일 생산업체인 C사는 20억 원의 운전자금 대출을 거래 은행에 신청했지만 판매대금이 제대로 회수되지 않고 있다는 점 때문에 대출 심사에서 떨어졌다. C사는 매출액이 지난해보다 크게 늘어나는 등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은행은 “대출 후 부실이 나면 지점장 자리가 날아간다”며 신청서를 돌려줬다. 본보가 확인한 C사 관련 대출심사 기록에는 ‘미회수 매출채권이 매출액의 40%에 이르러 회사의 차입금 상환능력이 의문시된다’고 명시돼 있었다. C사 관계자는 “일시적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해 운전자금을 신청했는데, 은행은 ‘일시적 위기’를 이유로 대출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반면 대기업에 부품을 대면서 회계법인의 외부 감사를 받는 중견기업에는 은행들이 서로 돈을 꿔주겠다며 줄을 선다. 경남 창원시에서 냉장고, 에어컨 부품을 대기업에 납품하는 D사는 최근 설비기계를 추가로 구입하려고 24억 원의 신규 대출을 은행에 신청했다. 이 회사 연간 매출액(300억 원)의 10%에 육박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대출이었지만, 한 달이 채 안 돼 대출승인이 났다. 은행 측은 “주 거래처가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영업전망이 안정적인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자금을 떼일 염려가 없는 것이 중소기업 대출의 첫 번째 요건이었던 셈. 일부 은행 지점장은 대출 보증서 발급이 확정된 중소기업들을 소개받으려고 신보와 기보 영업점에 ‘얼굴 도장’을 찍는 것이 중요한 일과라는 얘기도 들린다.

○ 정책자금 흐름 왜곡


시중은행들은 최근 기업에 대한 연대보증을 폐지했다. 과도한 보증요구 때문에 기업인들이 친인척에게 무리한 보증을 부탁하고, 아내 몰래 보증을 선 사람이 나중에 부실을 떠안아 가정이 깨지는 악순환을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하지만 기업인들이 은행에 가기 전 보증서 발급을 위해 들르는 기보와 신보에서 직계 존비속을 대상으로 한 연대보증을 요구하고 있어 “과거와 달라진 게 없다”는 불만이 많다. 신보나 기보는 자신들의 보증을 악용하는 일부 중소기업 경영자의 모럴해저드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나,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부보증기관들이 중기와 서민금융의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대부분의 중소기업 사장이 집을 담보로 잡히는 것은 기본이고 친인척에게도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쓴다”면서 “일부는 사채의 덫에 빠지기도 한다”며 씁쓸해했다. 홍순영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업 실적을 따질 때 부실 가능성만 보지 말고 대상 기업의 고용창출 효과, 성장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살피는 한편 경기 상황에 따라 보증과 대출 규모를 탄력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천=김철중 기자 tnf@donga.com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대출 한달 뒤에… 다른 지점서

은행 꺾기수법 점점 교묘해져 ▼

지난해 설비투자를 위해 급히 자금이 필요했던 중소기업 사장 A 씨는 거래 은행에서 5억 원을 대출받으면서 은행 부탁으로 100만 원짜리 저축성 보험에 가입했다. 이 은행은 최근 금융당국이 은행의 대출 ‘꺾기’를 조사한다면서 이 보험을 해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연말에는 수신실적을 높여야 하니 조사가 끝나면 적금을 다시 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A 씨는 “은행이 내 명줄을 잡고 있으니 보험이든 적금이든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푸념했다.

은행들이 대출을 신청한 사람들에게 강제로 정기예금, 보험, 퇴직연금 등에 가입하도록 하는 일명 ‘꺾기’ 관행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금융감독원은 KB국민은행의 1200여 개 영업점을 조사해 3분의 1에 이르는 356곳에서 600건의 ‘꺾기’를 적발하기도 했다. 꺾기 수법도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대출자로부터 ‘자발적 예금 가입’을 증명하는 확약서를 받는다거나 대출 한 달 이후에 예·적금을 받으면 꺾기 규제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해 몇 달이 지나 예금을 종용하는 일도 적지 않다. 일부 은행들은 규제를 피하기 위해 대출은 해당 은행의 C지점에서 받도록 하고, 예금은 D지점에서 가입하도록 권유한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스티브 잡스도 한국에선 좌절했을 것” ▼
■ 창업가 정신 꺾는 창업지원

2001년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들과 소프트웨어 개발회사를 차렸던 박모 씨(42·회사원)는 당시 사업계획서 한 장만으로도 은행에서 1억 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닷컴 열풍’이 불면서 보증회사가 쉽게 대출 보증서를 발급해줬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난 2011년 9월, 상황은 180도로 바뀌었다. 정보기술(IT) 관련 벤처기업에 다니는 박 씨는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기술보증기금에 보증서 발급을 신청했지만 신청 당일에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창업한 지 반년이 채 안 됐고 아직 영업이익이 나지 않아서 심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박 씨는 금리가 좀 비싸더라도 은행 대출을 받기로 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시중은행 지점은 대뜸 직원들의 급여계좌를 자기 은행에 개설하고 퇴직연금 상품에 가입하면 대출을 해줄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 은행 기업금융 담당 직원은 박 씨에게 “은행과 서로 믿고 성장할 수 있는 회사라는 점을 보여줘야 대출을 원하는 만큼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씨는 “국내 경기가 침체하면서 은행과 보증회사들이 자금을 보수적으로 운용하려는 현실은 이해하지만 ‘창업가 정신’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 보증회사들의 창업보증 기준은 매우 까다로워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청년 창업가들이 자격을 갖춰 보증을 받기란 매우 어렵다. 신용보증기금의 청년창업특례보증을 받으려면 만 20세 이상∼39세 이하인 사람이 대표로 있으면서 보증잔액이 없어야 한다. 특히 3000만 원 이상 보증을 받으려면 매장 임차계약이 돼 있으면서 매출실적도 양호해야 한다는 규정은 ‘한국판 스티브 잡스’ 탄생을 요원하게 한다. 신보의 개인사업자에 대한 신규 보증잔액은 올해 10월 말 현재 2조9000억 원으로 2009년 말(5조6000억 원)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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