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조사비, 물가보다 빨리 뛴다

  • 입력 2008년 5월 28일 18시 46분


"이달 국민연금도 고스란히 축의금으로 다 나가겠네…."

국내 유수의 시중은행에서 지점장까지 지내다 2002년 은퇴한 이모(58) 씨. 그의 한달 생활비는 2년 전부터 받은 국민연금 56만 원에 저축을 깬 것까지 합해 200만 원을 조금 넘는다. 그는 지난달에만 각종 경조사비로 생활비의 4분의 1인 55만 원을 썼다.

이 씨는 은퇴 후 돈을 아껴보려고 좋아하던 골프도 끊었지만, 결혼을 앞둔 세 자녀를 생각하면 경조사비만큼은 '끊을' 수 없는 형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인 이상 전국가구의 지난해 지출한 경조사비는 평균 51만9000원, 지난 한 해 국민들이 경조사비에 사용한 돈은 7조6681억 원이었다.

2003년 이후 4년간 2인 이상 가구의 경조사비 지출액 증가율은 18.7%로,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11.6%)보다 높았다.

경조사비 지출액이 물가상승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오르면서 가계운용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상호 부조(扶助)라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시대흐름에 맞지 않는 경조사비 문화가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물가보다 2~3배 빨리 오른 경조사비

'3만 원 5.6%, 5만 원 46.7%, 10만 원 33.4%, 20만 원 초과 13%'

본보 취재팀이 올해 5월 결혼한 중소기업 직원 A(30) 씨의 축의금 장부를 금액별로 분석한 결과다. A 씨는 호텔이 아닌 서울 시내의 한 평범한 예식장에서 혼사를 치렀다.

하객 중 약 절반이 5만 원을 냈고 10만 원을 낸 사람은 3명 중 1명꼴이었다. 또 13%는 20만 원이 넘는 돈을 부조했다.

하객별로는 A 씨와 같은 연배가 많은 '학교 동창, 선후배, 은사 군(群)'이 평균 6만1000원을 축의금으로 냈다. 5만 원은 이미 사회초년생들이 축의금으로 내기에도 적은 돈이 돼 버린 셈이다.

시대가 변해도 한국의 축의금은 일반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기준 축의금', 상대적으로 친분도가 떨어지지만 무시할 수 없는 관계인 사람에게 내는 '낮은 축의금', 상당히 친밀한 상대에게 내는 '높은 축의금' 3단계의 큰 틀을 유지해왔다. A씨의 축의금 분포로 보면 5만 원이 기본 축의금, 3만 원이 낮은 축의금, 10만 원이 높은 축의금이다.

9년 전 축의금 장부를 보자.

정 씨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B(41) 씨. 1999년 2월 결혼한 그가 287명의 하객에게서 받은 축의금 가운데 가장 비중이 컸던 액수는 3만 원으로 47.4%. 이어 5만 원 28.9%, 10만 원 12.2%, 2만 원 7.7%였다.

둘을 비교하면 9년간 낮은 축의금은 9년 만에 2만 원에서 3만 원으로 50%, 기준 축의금은 3만 원에서 5만 원으로 66.7% 올랐다. 또 한 단계 높은 축의금은 5만 원에서 10만 원으로, 고액 축의금은 10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갑절이 됐다.

1999년 2월부터 올 4월까지 소비자물가가 31.5% 오른 것과 비교하면 그간의 '축의금 인플레이션'은 물가상승률의 2~3배 수준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올해 결혼한 A씨의 축의금 분포로 봤을 대 기준 축의금이 5만 원에서 10만 원 쪽으로 강한 '상승 압력'을 받고 있었다.

●사회변화에 뒤쳐진 경조사문화

예비역 소장 A(61) 씨는 6년 전 전역했지만 옛 상관과 부하, 임관 동기, 대학 선후배 등 아직도 경조사를 챙겨야 할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A 씨는 결혼 성수기인 요즘엔 많을 때는 한 주에 10건이 넘게 챙긴 적도 있다. "심지어 '경조사비 때문에 이민가고 싶다'고 하는 예비역 동기들도 있다"고 전했다.

한국인이 노년에 부담해야 하는 경조사비는 지금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상시 구조조정으로 은퇴가 빨라진 데다 수명은 늘어나 과거 10년 남짓했던 은퇴 후 기대여생이 20~30년으로 크게 늘었다. 고정소득 없이 경조사비를 부담해야 하는 기간이 훨씬 길어진 것이다.

독신, 이혼 가정의 증가와 고령화 등으로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지만 경조사비 문화만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다. 저(低)출산에 따라 자녀 결혼식을 열 기회는 전보다 줄어든 반면 재혼은 증가하고 있어 경조사비 부담이 이중삼중으로 늘었다.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경조사비를 낸 만큼 돌려받을 가능성이 컸지만 도시화와 개방화로 공동체의 범위가 불분명해지면서 이런 '주고받기' 원칙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앙대 신인석(경제학) 교수는 "과거 농경사회에서 부조금은 사회보험 기능이 강했지만 지금은 여기에 네트워크 구축 기능이 추가됐다"며 "경조사비를 내는 것은 '내가 이 모임(그룹)에 속해있다'는 신호 또는 과시를 하는 수단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경조사가 진정한 축하나 위로가 아닌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의미로 변질된 지 오래.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의 행사에 참석하거나 축의금만 내고 정작 식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는 관행도 이와 무관치 않다.

결혼식 화환 대신 쌀 봉투를 받아 불우이웃을 돕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등 변화의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낡은 경조사비 관행을 바꾸기는 역부족이다.

성신여대 강석훈(경제학) 교수는 "경제적 능력, 친소(親疎) 관계를 가리지 않는 경조사비 문화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거품"이라며 "사회의 리더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차원에서 이를 걷어내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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