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왜 멈춰서나]철강-유화 생산량 40%가 재고

  • 입력 2000년 12월 3일 20시 26분


SK 손길승 회장은 요즘 재계 인사들과의 모임에서 “기업끼리 힘을 합쳐 이 난국을 타개하자”는 말을 자주 한다. 공급과잉에 시달리는 업종은 업계 스스로 생산량 조절을 통해 출혈경쟁을 피하자는 것. 그만큼 국내경기가 좋지 않음을 나타낸다.

▽너도나도 과잉생산 고민〓국내 제조업을 이끄는 핵심업종은 자동차 조선 화섬 철강 기계 건설 석유화학 반도체 등 8개. 이들 업종의 기상도는 수주물량을 비교적 넉넉히 확보한 조선을 빼면 ‘궂은 날씨’ 일색이다.

원인은 공급 과잉과 내수 위축이 겹쳤기 때문. 정확한 수요를 예측하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생산 용량을 늘린 상태에서 수요가 격감하자 거의 모든 업종이 생산할수록 손해가 불어나는 딱한 처지에 빠졌다.

자율감산에 본격적으로 들어간 석유화학 업종 외에 철강 화섬 등 다른 업종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창고에 재고가 쌓여 고생하기는 마찬가지다.

철강은 건설경기가 장기 침체에 빠지면서 건설용 자재로 쓰이는 철근 등의 수요가 격감했다. 형강과 강관은 국내 필요량이 연간 생산규모의 60%에 불과한 실정.

화섬업계는 11월초 부실기업 퇴출에서 제외돼 고질적인 공급 과잉이 계속될 전망. 원료가격은 작년보다 최고 두 배 가까이 뛰었지만 중국업체들의 가격인하 공세에 맞서느라 적자수출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다.

유화의 국내 생산용량은 에틸렌 기준 480만t으로 국내 수요량인 200만∼300만t을 채우고도 200만t 가량이 남아돈다. 한화석유화학 김형준 환경안전기획팀 부장은 “11월은 겨울을 앞두고 비닐하우스 등의 수요가 있어 성수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성수기를 맞고도 현상유지는커녕 오히려 멀쩡한 기계를 놀려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한 것이다.

▽한계기업 연쇄부도 우려〓조업단축이 지속되면 기업들은 원료 구입에 쓰는 지출이 줄어들고 재고 부담도 덜 수 있다. 하지만 생산을 덜 하다보니 내다 팔 물건이 줄어들게 된다. 당연히 매출이 감소해 돈이 들어오지 않고 이는 현금흐름이 좋지 않은 기업에 치명적 타격을 준다.

상당수 기업들은 이미 1년 이상 회사채 발행이나 신규 대출이 끊긴 것은 물론 대출금의 만기연장도 안되는 실정.

전경련 김석중 상무는 “지금까지 기업들이 영업을 통해 벌어들인 현금으로 근근이 버텨왔는데 채산성 악화를 걱정해 공장 가동률을 낮추다 보면 한계기업들은 도산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산업경쟁력 키워야〓이같은 현상의 근본원인은 우리 기업들이 국제무대에서 살아남을 만한 경쟁력을 키우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지적.

삼성경제연구소 김학상 수석연구원은 “외환위기 이후 급한 불을 끄는 데 급급해 기술개발을 소홀히 한 탓에 내수시장을 외국업체에 내주고 국제시장에서도 밀리는 사태가 빚어졌다”고 지적했다.

한국경제연구원 박승록 연구위원은 “소비재 수요가 줄어 중간재 생산이 위축되는 것은 실물경제의 전반적인 침체라는 점에서 예사롭게 넘길 일이 아니다”며 “경기가 좋지 않을 때일수록 규제완화를 통해 새로운 성장엔진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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